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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元紹)가 답돈(蹋頓), 난루(難樓), 초왕(峭王), 한로왕(汗魯王)에게 황제의 명령을 위조해 인수를 하사하고 선우로 삼음

  • 국가
    오환(烏丸)
[후]한 말기에주 001
각주 001)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漢末”을 “靈帝初”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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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오환(遼西烏丸)의 대인(大人)인 구력거(丘力居)주 002
각주 002)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遼西烏丸大人丘力居”를 “遼西有丘力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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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5천여 락(落)을 거느렸고, 상곡오환(上谷烏丸)의 대인인 난루(難樓)주 003
각주 003)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上谷烏丸大人難樓”를 “烏桓大人上谷有難樓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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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9천여 락을 통솔하였으며, 각자 스스로를 왕(王)이라 칭하였다.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오환 대인 소복연(蘇僕延)주 004
각주 004)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而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을 “又遼東蘇僕延”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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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1천여 락을 거느리고 스스로를 초왕(峭王)이라 칭하였다. 우북평오환(右北平烏丸)의 대인인 오연(烏延)주 005
각주 005)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右北平烏丸大人烏延”을 “右北平烏延”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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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8백여 락을 거느렸는데 스스로를 한로왕(汗魯王)이라 칭하였다. 이들은 모두 계교와 방책이 있었으며 용감하고 건실하였다.주 006
각주 006)
원문은 “皆有計策勇健”인데, 『後漢書』에서는 “並勇健而多計策”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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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태수(中山太守)주 007
각주 007)
『後漢書』에는 “전직 中山太守[前中山太守]”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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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장순(張純)이 배반하여 구력거의 무리 속으로 들어간 후주 008
각주 008)
원문은 “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인데, 『後漢書』에서는 “中平四年, 前中山太守張純畔, 入丘力居眾中”이라 하여 이 사건이 靈帝 中平 4년(187)에 발생했음을 밝혔다. 또 원문의 ‘叛’字를 『後漢書』에서는 ‘畔’字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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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칭하고 3군(郡) 오환의 [군대를 지휘하는] 우두머리[元帥]가 되었다.주 009
각주 009)
원문은 “爲三郡烏丸元帥”인데, 『後漢書』에서는 “遂爲諸郡烏桓元帥”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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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주](靑州), 주 485
각주 485)
靑州: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東省 德州市·平原縣·高唐縣 以東, 河北省 吳橋縣과 山東省 馬頰河 以南, 濟南·臨胊·安丘·卽墨·萊陽 등 市와 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에는 臨淄縣(현재 山東省 淄博市 臨淄鎭 북쪽)에 治所를 두었다. 魏晉時代 靑州의 서북쪽 경계는 축소되고 남쪽 경계는 확장되어 현재의 山東省 莒南·日照 등 縣 지역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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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徐州), 주 011
각주 011)
徐州: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江蘇省 長江 이북과 山東省 동남부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鄒縣(현재 山東省 郯城縣)에 治所를 두었다가 三國 魏 시기 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市)으로 治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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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幽州), 기[주](冀州) 주 012
각주 012)
冀州:前漢 武帝시기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중남부와 山東省 西端, 河南省 北端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 초기 治所는 高邑縣(현재 河北省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시기에 鄴縣(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의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 郡國을 관장하였고, 관할구역은 前漢時代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河北省 大淸河와 天津市 海河 以南으로 확대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魏晉時代에는 信都縣(현재 河北省 冀州市)이 治所가 되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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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州)를 침입하고 노략질하였으며, 주 013
각주 013)
원문은 “寇略”인데, 『後漢書』에서는 ‘略’字 대신 ‘掠’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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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과 백성들을 죽이고 붙잡아갔다. 영제(靈帝) 주 014
각주 014)
靈帝(157~189;재위 167~189):이름은 劉宏이며, 章帝의 玄孫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解瀆亭侯에 봉해졌다. 永康元年(167)에 桓帝 사후 竇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竇武가 皇帝로 옹립하였다. 재위기간 중 竇武와 陳蕃이 宦官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宦官들은 계속 정치에 간여하였다. 환관들은 黨禁을 다시 일으켜서 李膺·杜密 등 100여 인을 체포하여 죽였고 豪傑과 儒學者, 덕행 있는 사람을 黨人으로 몰아 600~700여 인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거나 禁錮에 처하였다. 西邸에서 공개적으로 官爵을 팔았으며 天下의 田畝에 100錢의 세금을 매겨 宮室을 세웠다. 中平元年(184)에 黃巾賊이 봉기하여 後漢이 사실상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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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주 015
각주 015)
『後漢書』에는 이 사건이 獻帝 中平 5년(188)에 발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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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조정은] 유우(劉虞) 주 016
각주 016)
劉虞(?~193):後漢시대 東海郡 郯縣 사람이며 字는 伯安이다. 孝廉에 察擧되어 幽州刺史·甘陵相·宗正을 지냈다. 靈帝때 前中山相 張純과 前泰山太守 張擧 등이 烏桓과 연합하여 起兵하자 幽州牧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여 太尉로 승진되고 容丘侯에 봉해졌다. 董卓이 정권을 잡은 후 大司馬에 임명되었고 襄賁侯에 봉해졌다. 袁紹가 董卓을 토벌하려 할 때 그를 맹주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靑州·冀州 등지를 수년 동안 경영하여 농경을 권유하고 독려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후에 公孫瓚과 사이가 멀어져 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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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유주목(幽州牧)주 017
각주 017)
幽州牧: 幽州의 지방장관을 뜻한다. 漢武帝 때 전국을 13州部로 나누고 刺史를 두어 諸郡을 감찰하게 하였다. 秩은 六百石이었다. 成帝 綏和元年(전8) 刺史를 州牧으로 改稱하고 秩은 二千石으로 높아져 지위는 九卿 다음이었다. 哀帝 建平 2년(전5) 원래의 명칭과 秩로 바뀌었다. 元壽 2년(전1) 다시 州牧으로 바꾸었다. 後漢時代에는 刺史를 설치하고 秩은 六百石이었으며, 監察을 담당하였다. 후에 점차로 州가 행정구역의 기능을 하면서 일급 지방행정장관이 되었다. 靈帝 中平 5년(188) 太常 劉焉이 黃巾賊의 난 이후 四方에 일이 많고 刺史의 권위가 낮아 州牧을 두어 重臣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靈帝가 이를 따랐다. 州牧은 州의 軍政大權을 장악하여 郡守보다 지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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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임명하니, [유우는] 호(胡)를 불러모아 장순의 머리를 참하니, 주 018
각주 018)
원문은 “募胡斬純首”인데, 『後漢書』에서는 “虞購募斬純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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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변방지대[北州]는 이에 안정되었다.
후에 구력거가 죽고주 019
각주 019)
원문은 “後丘力居死”인데, 『後漢書』에서는 “獻帝初平中, 丘力居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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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누반(樓班)이 나이가 어렸던주 020
각주 020)
원문은 “年小”인데, 『後漢書』에서는 ‘小’字 대신 ‘少’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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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조카인 답돈(蹋頓)에게 무예와 지략이 있었기 때문에 [답돈이] 대신 대인이 되어 3왕의 무리들[三王部]주 021
각주 021)
三王部:‘部’는 유목민 집단을 지칭한다. 蹋頓이 大人이 된 후 上谷大人 難樓와 遼東大人 蘇僕延, 右北平大人 烏延 등을 거느렸다는 『資治通鑑』 기사로 보아(『資治通鑑』 卷63 「漢紀」55 〈獻帝建安四年條〉:2013, “初, 烏桓王丘力居死, 子樓班年少, 從子蹋頓有武略, 代立, 總攝上谷大人難樓·遼東大人蘇僕延·右北平大人烏延等.”) 3王은 難樓와 蘇僕延, 烏延을 지칭한다. 따라서 “三王部”는 難樓와 蘇僕延, 烏延이 지휘하는 유목민 집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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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두 거느리니주 022
각주 022)
원문은 “總攝三王部”, 『後漢書』에서는 “總攝三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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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들은 모두 그의 명령[敎令]주 023
각주 023)
『後漢書』에서는 “敎令” 대신 “號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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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랐다. 원소(袁紹)공손찬(公孫瓚) 주 024
각주 024)
公孫瓚(?~199):後漢시대 遼西郡 令支縣 사람으로 字는 伯珪이다. 처음에 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涿令·騎都尉를 역임하였다. 袁紹가 冀州를 점거한 후 袁紹와 자웅을 겨루었다. 初平 4년(193) 幽州牧 劉虞를 내쫓고 幽州를 차지했으나, 계속 袁紹에 패하여 建安 4년(199)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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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속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자, 주 025
각주 025)
원문은 “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인데, 『後漢書』에서는 “建安初, 冀州牧袁紹與前將軍公孫瓚相持不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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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돈은 사신을 원소에게 보내 화친(和親)을 구하였고, [화친이 성사되자]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하였다.주 026
각주 026)
원문은 “助紹擊瓚”인데, 『後漢書』에서는 “建遂遣兵助擊瓚”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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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황제의 명령[制]을 위조하여 답돈, [난루], 초왕, 한로왕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고, 모두 선우(單于)로 삼았다.주 027
각주 027)
원문은 “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 皆以爲單于.”인데, 『後漢書』에서는 “紹矯制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 皆以單于印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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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지주]

  • 각주 001)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漢末”을 “靈帝初”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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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遼西烏丸大人丘力居”를 “遼西有丘力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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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上谷烏丸大人難樓”를 “烏桓大人上谷有難樓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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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而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을 “又遼東蘇僕延”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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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後漢書』에서는 원문의 “右北平烏丸大人烏延”을 “右北平烏延”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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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은 “皆有計策勇健”인데, 『後漢書』에서는 “並勇健而多計策”이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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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後漢書』에는 “전직 中山太守[前中山太守]”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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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원문은 “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인데, 『後漢書』에서는 “中平四年, 前中山太守張純畔, 入丘力居眾中”이라 하여 이 사건이 靈帝 中平 4년(187)에 발생했음을 밝혔다. 또 원문의 ‘叛’字를 『後漢書』에서는 ‘畔’字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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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원문은 “爲三郡烏丸元帥”인데, 『後漢書』에서는 “遂爲諸郡烏桓元帥”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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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靑州: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山東省 德州市·平原縣·高唐縣 以東, 河北省 吳橋縣과 山東省 馬頰河 以南, 濟南·臨胊·安丘·卽墨·萊陽 등 市와 縣 以北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時代에는 臨淄縣(현재 山東省 淄博市 臨淄鎭 북쪽)에 治所를 두었다. 魏晉時代 靑州의 서북쪽 경계는 축소되고 남쪽 경계는 확장되어 현재의 山東省 莒南·日照 등 縣 지역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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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徐州:前漢 武帝가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江蘇省 長江 이북과 山東省 동남부 지역이다. 後漢時代에는 鄒縣(현재 山東省 郯城縣)에 治所를 두었다가 三國 魏 시기 彭城(현재의 江蘇省 徐州市)으로 治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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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冀州:前漢 武帝시기 설치한 13 刺史部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河北省 중남부와 山東省 西端, 河南省 北端 지역에 해당한다. 後漢 초기 治所는 高邑縣(현재 河北省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시기에 鄴縣(현재 河北省 臨漳縣 서남의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 郡國을 관장하였고, 관할구역은 前漢時代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河北省 大淸河와 天津市 海河 以南으로 확대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魏晉時代에는 信都縣(현재 河北省 冀州市)이 治所가 되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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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원문은 “寇略”인데, 『後漢書』에서는 ‘略’字 대신 ‘掠’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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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靈帝(157~189;재위 167~189):이름은 劉宏이며, 章帝의 玄孫이다.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解瀆亭侯에 봉해졌다. 永康元年(167)에 桓帝 사후 竇太后와 그녀의 아버지 竇武가 皇帝로 옹립하였다. 재위기간 중 竇武와 陳蕃이 宦官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宦官들은 계속 정치에 간여하였다. 환관들은 黨禁을 다시 일으켜서 李膺·杜密 등 100여 인을 체포하여 죽였고 豪傑과 儒學者, 덕행 있는 사람을 黨人으로 몰아 600~700여 인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거나 禁錮에 처하였다. 西邸에서 공개적으로 官爵을 팔았으며 天下의 田畝에 100錢의 세금을 매겨 宮室을 세웠다. 中平元年(184)에 黃巾賊이 봉기하여 後漢이 사실상 붕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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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後漢書』에는 이 사건이 獻帝 中平 5년(188)에 발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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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劉虞(?~193):後漢시대 東海郡 郯縣 사람이며 字는 伯安이다. 孝廉에 察擧되어 幽州刺史·甘陵相·宗正을 지냈다. 靈帝때 前中山相 張純과 前泰山太守 張擧 등이 烏桓과 연합하여 起兵하자 幽州牧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여 太尉로 승진되고 容丘侯에 봉해졌다. 董卓이 정권을 잡은 후 大司馬에 임명되었고 襄賁侯에 봉해졌다. 袁紹가 董卓을 토벌하려 할 때 그를 맹주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靑州·冀州 등지를 수년 동안 경영하여 농경을 권유하고 독려하여 민생이 비교적 안정되었다. 후에 公孫瓚과 사이가 멀어져 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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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幽州牧: 幽州의 지방장관을 뜻한다. 漢武帝 때 전국을 13州部로 나누고 刺史를 두어 諸郡을 감찰하게 하였다. 秩은 六百石이었다. 成帝 綏和元年(전8) 刺史를 州牧으로 改稱하고 秩은 二千石으로 높아져 지위는 九卿 다음이었다. 哀帝 建平 2년(전5) 원래의 명칭과 秩로 바뀌었다. 元壽 2년(전1) 다시 州牧으로 바꾸었다. 後漢時代에는 刺史를 설치하고 秩은 六百石이었으며, 監察을 담당하였다. 후에 점차로 州가 행정구역의 기능을 하면서 일급 지방행정장관이 되었다. 靈帝 中平 5년(188) 太常 劉焉이 黃巾賊의 난 이후 四方에 일이 많고 刺史의 권위가 낮아 州牧을 두어 重臣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여 靈帝가 이를 따랐다. 州牧은 州의 軍政大權을 장악하여 郡守보다 지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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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원문은 “募胡斬純首”인데, 『後漢書』에서는 “虞購募斬純首”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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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원문은 “後丘力居死”인데, 『後漢書』에서는 “獻帝初平中, 丘力居死”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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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원문은 “年小”인데, 『後漢書』에서는 ‘小’字 대신 ‘少’字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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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三王部:‘部’는 유목민 집단을 지칭한다. 蹋頓이 大人이 된 후 上谷大人 難樓와 遼東大人 蘇僕延, 右北平大人 烏延 등을 거느렸다는 『資治通鑑』 기사로 보아(『資治通鑑』 卷63 「漢紀」55 〈獻帝建安四年條〉:2013, “初, 烏桓王丘力居死, 子樓班年少, 從子蹋頓有武略, 代立, 總攝上谷大人難樓·遼東大人蘇僕延·右北平大人烏延等.”) 3王은 難樓와 蘇僕延, 烏延을 지칭한다. 따라서 “三王部”는 難樓와 蘇僕延, 烏延이 지휘하는 유목민 집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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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원문은 “總攝三王部”, 『後漢書』에서는 “總攝三郡”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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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後漢書』에서는 “敎令” 대신 “號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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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公孫瓚(?~199):後漢시대 遼西郡 令支縣 사람으로 字는 伯珪이다. 처음에 郡吏가 되었다가 후에 涿令·騎都尉를 역임하였다. 袁紹가 冀州를 점거한 후 袁紹와 자웅을 겨루었다. 初平 4년(193) 幽州牧 劉虞를 내쫓고 幽州를 차지했으나, 계속 袁紹에 패하여 建安 4년(199)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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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원문은 “袁紹與公孫瓚連戰不決”인데, 『後漢書』에서는 “建安初, 冀州牧袁紹與前將軍公孫瓚相持不決”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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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원문은 “助紹擊瓚”인데, 『後漢書』에서는 “建遂遣兵助擊瓚”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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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원문은 “紹矯制賜蹋頓·(難)峭王·汗魯王印綬, 皆以爲單于.”인데, 『後漢書』에서는 “紹矯制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 皆以單于印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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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구력거(丘力居), 난루(難樓), 소복연(蘇僕延), 초왕(峭王), 오연(烏延), 한로왕(汗魯王), 장순(張純), 구력거,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 영제(靈帝), 유우(劉虞), 유우, 장순, 구력거, 누반(樓班), 답돈(蹋頓), 답돈, 원소(袁紹), 공손찬(公孫瓚), 답돈, 원소, 원소, 공손찬, 원소, 답돈, 난루, 초왕, 한로왕, 배송지
지명
[후]한, 요서, 상곡, 요동속국(遼東屬國), 우북평, 중산,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幽州), 기[주](冀州), 후한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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