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4
by Silla on 2024-02-24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등의 중국 정사와 『대당서역구법순례행기(大唐求法巡禮行記)』·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는 사로국(斯盧國)·설라(薛羅)·신로(新盧)·신라·사라·구구탁예설라 등이,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등 일본측 문헌에서는 신라·신량(新良)·사라·계림(鷄林)·지라기(志羅紀) 등이 신라 국호로 쓰였다고 전한다. 한편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는 ‘사라’, 「울진 봉평리 신리비」에서는 ‘신라’라는 국호가 적혀 있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에서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 또는 계림이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탈해이사금 9년 3월조에 김알지가 탄생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바꾸고, 이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기림이사금 10년조에 다시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3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조에서 신라를 사로국이라고 표현하였고, 『양서』 권54 열전제48 제이(諸夷) 동이(東夷) 신라조에서 “위나라(북위) 때에는 신로(新盧), 송나라 때에는 사라 혹은 신라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과 더불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에서 ‘신라’, 503년 9월 25일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 ‘사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신라의 국호는 대체로 서라벌(서벌)→사로→사라 또는 신라→신라의 순으로 변천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105~106쪽). 탈해이사금 때에 계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신라를 언제부터 계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중고기의 금석문에서 계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중고기 말이나 그 이후 시기에 비로소 신라를 계림이라고 별칭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