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 삼국유사 - 탈해
by Silla on 2020-02-09
탈해치질금(한편 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 (고본에 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 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의 모(母)였다.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한편 正明國 혹은 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 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이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맏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었는데 이가 바로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 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올리려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하여 “이후로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후에야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노례왕(弩禮王)이 세상을 떠나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은 까닭에 성을 석(昔)씨로 하였다. 혹은 까치 덕분에 상자를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새 조(鳥)를 떼고 성을 석(昔)씨로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고 한다.
재위 23년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䟽川丘) 속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 신(神)이 명령하기를 “내 뼈를 조심스럽게 묻어라.” 했다. 그 두개골의 둘레는 3척 2촌이고 몸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나 되었다. 치아는 서로 붙어 마치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이는 소위 천하에 당할 자 없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 안에 안치하자 신이 다시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영을 내려 그 곳에 모시게 하였다. 한편 돌아가신 이후 제27세 문호왕(文虎王)대인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 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 ‘내가 바로 탈해다.’ 라고 하며 소천구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