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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의 귀환을 청함/임나와 신라 갈등의 시작

이 해에 임나주 001
번역주 001)
임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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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주 002
번역주 002)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해외에 파견한 사자가 천황의 사망 후에 귀환한다는 이야기는 田道間守(100년 봄 3월 신미삭 임오조), 阿知使主(응신천황 41년 2월 是月조)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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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주 003
번역주 003)
『삼국지』 위서 倭人조에 「倭錦·絳淸縑」 등의 용어가 보인다. 또한 『三國遺事』 延烏郞·細烏女조의 전설도 비단과 관련이 있으며, 신라와 왜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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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 필을 주어 임나왕(任那王;미마나노코니키시, 미마나노코키시)주 004
번역주 004)
왕을 코니키시 또는 코키시로 읽은 것은 『周書』 百濟傳에서 백제의 왕을 ‘鞬吉支’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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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주 005
번역주 005)
신라가 물건을 빼앗는 이야기는 분주에도 보이고 있고, 또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 47년 4월조와 應神天皇 14년 이 해조에도 보인다. 신라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神代 上 一書(8-4)의 ‘신라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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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어떤 책(一)에서 말하기를 어간성 천황 주 006
번역주 006)
숭신천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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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어 배를 타고 와서 월국(越國;코시노쿠니)주 007
번역주 007)
현재 福井縣 敦賀市 氣比神社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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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포(笥飯浦;케히노우라)에 정박하였다주 008
번역주 008)
이후의 이야기는 ‘任那入朝’의 기원담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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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곳을 각록(角鹿;츠누가)주 009
번역주 009)
『古事記』 仲哀天皇段에는 ‘都奴賀’란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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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이름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부가라국주 010
번역주 010)
『삼국유사』 五伽耶조에 보이는 대가야(고령)라고 보는 설과 금관가야(김해)로 보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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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츠누가아라시토)이고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주 011
번역주 011)
于斯岐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에도 보인다. 阿利叱智는 阿利斯等과 같은 말이며, 于岐는 소국의 왕호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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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일본국주 012
번역주 012)
‘일본국’이란 표기는 빨라도 7세기 후반 이후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는 大寶令에 의한 수식문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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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귀화하였다. 혈문(穴門;아나토)주 013
번역주 013)
율령제의 長門國 서남부로 지금의 下關해협 주변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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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했을 때에 그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이츠츠히코)였다. 나에게 ‘나는 곧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왕은 없다주 014
번역주 014)
외국 사신에게 자신이 천황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日本書紀』 흠명천황 31년 5월조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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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왕이 아님을 알고 즉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알지 못해서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다. 북해주 015
번역주 015)
여기서는 동해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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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돌아와 출운국(出雲國;이즈모)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때 천황주 016
번역주 016)
숭신천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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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었다. 그대로 머물러 활목천황 주 017
번역주 017)
수인천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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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섬겨 3년이 경과하였다. 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러고 싶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을 불러 “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만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본국주 018
번역주 018)
意富加羅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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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즉시 너의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미마나노쿠니)주 019
번역주 019)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右京 三間名公조에는 ‘彌麻奈’로 되어있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미마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미마키(이리비코)천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과 반대로 미마나의 이름에서 천황의 이름(미마키이리비코)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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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주 020
번역주 020)
마을의 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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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보관하여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어떤 책(一)에서 말하기를 ) 처음에 도노아아라사등이 본국에 있을 때 황우(黃牛)에 농기구를 싣고 시골로 갔다. 그런데 황우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 갔다. 흔적은 어떤 군아(郡衙)주 021
번역주 021)
郡衙는 관공서로 郡家, 郡役所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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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 있었다. 한 노인이 “그대가 찾는 소는 이 군아에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주 022
번역주 022)
村主 등 촌의 유력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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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소가 짊어지고 있는 물건주 023
번역주 023)
田器로 농기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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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보면 틀림없이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오면 물건으로 보상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잡아서 먹어버렸다. 만일에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물으면 재물을 바라지 말고, ‘군내(郡內)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을 달라’고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군공들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물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어서 흰 돌을 소 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자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交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동쪽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서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찾는 소녀는 난파(難波;나니하)에 와서 비매어증사(比賣語曾社;히메고소노야시로)주 024
번역주 024)
『延喜式』 神名帳에 「攝津國 東生郡 比賣許曾社」가 보인다. 大阪市 東成區 東小橋 三町目에 위치하며, 원래 天王寺區 小橋町 愛來目山의 産湯稻荷神社 북쪽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古事記』 應神天皇段 天之日矛 설화기사의 분주에서는 比賣碁曾社에서 阿加流比賣神을 제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소(語曾)가 신라의 居西干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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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이 되었다. 또 풍국(豐國;토요쿠니)의 국전군(國前郡;미치노쿠치노코호리)주 025
번역주 025)
율령제의 豐後國 國埼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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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다시 비매어증사의 신이 되었다. 두 곳에서 나란히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 번역주 001)
    임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2)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해외에 파견한 사자가 천황의 사망 후에 귀환한다는 이야기는 田道間守(100년 봄 3월 신미삭 임오조), 阿知使主(응신천황 41년 2월 是月조)에도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삼국지』 위서 倭人조에 「倭錦·絳淸縑」 등의 용어가 보인다. 또한 『三國遺事』 延烏郞·細烏女조의 전설도 비단과 관련이 있으며, 신라와 왜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로 생각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왕을 코니키시 또는 코키시로 읽은 것은 『周書』 百濟傳에서 백제의 왕을 ‘鞬吉支’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신라가 물건을 빼앗는 이야기는 분주에도 보이고 있고, 또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 47년 4월조와 應神天皇 14년 이 해조에도 보인다. 신라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神代 上 一書(8-4)의 ‘신라국’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6)
    숭신천황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현재 福井縣 敦賀市 氣比神社 부근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이후의 이야기는 ‘任那入朝’의 기원담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古事記』 仲哀天皇段에는 ‘都奴賀’란 말이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삼국유사』 五伽耶조에 보이는 대가야(고령)라고 보는 설과 금관가야(김해)로 보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于斯岐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에도 보인다. 阿利叱智는 阿利斯等과 같은 말이며, 于岐는 소국의 왕호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일본국’이란 표기는 빨라도 7세기 후반 이후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는 大寶令에 의한 수식문이라 볼 수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율령제의 長門國 서남부로 지금의 下關해협 주변을 가리킨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외국 사신에게 자신이 천황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日本書紀』 흠명천황 31년 5월조에도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여기서는 동해의 의미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숭신천황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수인천황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意富加羅國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右京 三間名公조에는 ‘彌麻奈’로 되어있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미마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미마키(이리비코)천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과 반대로 미마나의 이름에서 천황의 이름(미마키이리비코)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마을의 창고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郡衙는 관공서로 郡家, 郡役所라고도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村主 등 촌의 유력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田器로 농기구를 의미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延喜式』 神名帳에 「攝津國 東生郡 比賣許曾社」가 보인다. 大阪市 東成區 東小橋 三町目에 위치하며, 원래 天王寺區 小橋町 愛來目山의 産湯稻荷神社 북쪽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古事記』 應神天皇段 天之日矛 설화기사의 분주에서는 比賣碁曾社에서 阿加流比賣神을 제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소(語曾)가 신라의 居西干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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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소나갈질지, 소나갈질지, 어간성 천황, 도노아아라사등, 우사기아리질지간기, 이도도비고, 활목천황, 도노아아라사등, 아라사등, 어간성천황, 아라사등, 아라사등, 도노아아라사등, 아라사등, 아라사등, 아라사등
지명
사반포, 각록, 혈문, 출운국, 난파, 풍국, 국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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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의 귀환을 청함/임나와 신라 갈등의 시작 자료번호 : ns.k_0013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