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475~0561 年代記 > 0551~0553 百濟와 新羅의 고려 침공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534 北魏→東魏+西魏
北魏의 효무제는 高歡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피하여 宇文泰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자 고환은 鄴에서 효정제를 옹립하였다. 한편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였다.
2217 SHARED
 
0550 ~ 0559 北齊 문선제 고양
8048#1990 SHARED COMMENT
 
0550 ~ 0577 東魏➔北齊
547년에 東魏의 실권자 高歡이 죽자 그의 맏아들 高澄이 권력을 계승하였는데 549년에 살해되었다. 그러자 고환의 차남 高洋이 난을 수습하고 황제가 되어 北齊를 세웠다. 577년에 北周에게 망했다.
2218 SHARED
 
0550.06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北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31 SHARED COMMENT
 
0550.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북제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8032 SHARED COMMENT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8016 SHARED COMMENT
 
0551 日本書紀(720)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35340 SHARED COMMENT
 
0551 日本書紀(720)※
▐ 대동강변의 平壤은 백제의 영토였던 적이 없으므로 討平壤凡六郡之地遂復故地에 있는 平壤은 한강변의 平壤인 듯하다.
8011 SHARED
 
0551 三國史記(1145) 열전
王命 居柒夫等八將軍 與百濟侵髙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乗勝 取竹嶺以外髙峴以内十郡 진흥왕이 거칠부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35342 SHARED
 
0551 ❰❰ 0553.10 日本書紀(720)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이 때 백제군의 환호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 553년의 정황에는 맞지 않으므로 551년으로 옮긴다.
8049 SHARED COMMENT
 
0551 ❰❰ 0553.10 日本書紀(720)※
▐ 이 기록의 東聖山을 지금의 평양 동쪽에 있는 大城山으로보면 551년 사건에서 말하는 平壤은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된다.
671 SHARED
 
0551 三國史記(1145) 新羅본기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乘勝取十郡 진흥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 이 사건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이상하게도 신라본기와 열전에만 있고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없다.
35341 SHARED COMMENT
 
0551.05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북제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33 SHARED COMMENT
 
0551.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돌궐이 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옮겨서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양원왕이 장군 고흘을 보내 병력 1만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009 SHARED COMMENT
 
0551~0552  돌궐로부터 시작된 낙랑고려의 위기
0551~0552 돌궐로부터 시작된 낙랑고려의 위기
551년 9월 고려는 돌궐이 요동의 신성과 백암성을 침공해 오자 1만의 군사를 내어 이를 물리친다. 그러나 같은 해에 백제와 임나가 신라와 함께 한강 유역을 침공해 왔지만 고려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뺏기고 만다. 돌궐의 침공을 방어하느라 남쪽에 방어의 공백이 생겼다는 설명이 자연스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52년에는 북제 사신이 와서 고려로 흘러간 중국 유민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양원왕을 구타한 뒤 데려가기도 했다.
5532 SHARED COMMENT
 
0551~0552  돌궐로부터 시작된 낙랑고려의 위기
0551~0552 돌궐로부터 시작된 낙랑고려의 위기
이렇게 사면초가에 처한 고려의 타개책은 신라와 손을 잡고 신라와 백제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에 처했다. 백제는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힘들게 되찾은 한성에서 철수했다. 백제가 버린 한성은 신라가 주웠다.
24819 SHARED
 
0551~0552 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면 돌궐의 木汗可汗(553~572)이 遼海 이서까지 진출하여 契丹, 室韋, 庫莫奚 등 여러 종족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또 新城과 白巖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고구려·말갈과 돌궐의 利稽察 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8017 SHARED
 
0551~0552 김석동
돌궐 또한 한민족 고대사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돌궐은 당과는 적대 관계였으나 고구려와는 우호·동맹 관계였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역시 돌궐과는 우호 관계였다. ▐ 고려와 돌궐은 항상 우호 관계였던 것이 아니라 당나라 이전에는 적대 관계였다. 또 발해는 신라와 적대 관계였고 일본과 우호 관계였던 것으로 보아, 우호 관계와 종족적 친연성은 별개의 문제다.
24820 SHARED
 
0552 北史(659)
文宣至營州 使博陵崔柳使于高麗 求魏末流人 敕柳曰 若不從者 以便宜從事 及至 不見許 柳張目叱之 拳擊成墜於床下 成左右雀息不敢動 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35351 SHARED COMMENT
 
0552 北史(659)
문선제는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위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을 요구케 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成(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 뜨렸다(拳擊成墜於床下). 成의 좌우는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 받아 복명하였다.
8012 SHARED COMMENT
 
0552 日本書紀(720)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漢城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 백제가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기록과 함께 고려가 신라와 손을 잡자 백제가 한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스스로 물러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신라가 이곳을 무력으로 빼앗았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8007 SHARED COMMENT
 
0552.05 日本書紀(720)
백제, 가라, 안라가 중부 덕솔 木刕今敦과 하내부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故謹求請救兵 先攻不意 軍之多少 隨天皇勅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日本府臣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라고 하였다.
8010 SHARED COMMENT
 
0552.05 日本書紀(720)
▐ 고려와 신라 중에서 절박한 처지에 있었던 나라는 고려였다. 따라서 먼저 손을 내민 쪽은 고려라고 보아야 한다. 전해에 신라가 고려의 10군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것을 돌려주지 않고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고려의 선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8039 SHARED COMMENT
 
0553.01 日本書紀(720)
백제가 상부 덕솔 科野次酒와 간솔 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35345 SHARED COMMENT
 
0553.06 日本書紀(720)
내신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의박사·역박사·력박사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 복서 및 역본과 여러 가지 약물도 보내라”고 하였다.
35346 SHARED COMMENT
 
0553.07 三國史記(1145)
取百濟東北鄙置新興以阿湌武力爲軍主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8013 SHARED COMMENT
 
0553.07 三國史記(1145)
新羅取東北鄙置新州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였다.
30217 SHARED
 
0553.08 日本書紀(720)
백제가 상부 나솔 과야신라와 하부 고덕 문휴대산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박국(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8015 SHARED COMMENT
 
0553.10 三國史記(1145)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 일본서기의 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나 삼국사기의 取百濟東北鄙置新興과 新羅取東北鄙置新州를 볼 때, 백제는 스스로 이 지역에서 물러난 듯하다. 그 이유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高麗與新羅通和幷勢謀滅臣國與任那라며 병력 지원을 계속 요청한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자신에게서 十郡을 빼앗은 신라에게 손을 내민 것은 남북으로 침공을 받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백제가 공주를 신라에 시집보낸 것도 나름의 최선이었다.
30218 SHARED
 
0554 관산성 전투
8048#29624 SHARED
 
0555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북제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34 SHARED COMMENT
 
0559.03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서거하니 이름을 양원왕이라 하였다.
8030 SHARED COM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