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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왜인(倭人)에 대한 소개

  • 국가
    왜(倭)
왜인
인(倭人)주 001
각주 001)
倭人:중국 史書에서 日本人 또는 日本國을 부르는 명칭이다. 委라고도 한다. 唐代에 이르러 日本이라고 개칭하기 전까지 일본인들 자신도 중국과 교통하는 경우에는 倭라고 칭하였다. 『山海經』 海內北經에 蓋國이 倭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論衡』(卷8 「儒增篇」, 卷13 「超奇篇」, 卷19 「恢國篇」)에는 周왕조 때 조공한 국가로 기록되어 있지만, 『漢書』 「地理志」에 “樂浪의 바다 한가운데 倭人이 있다. 백여 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歲時마다 와서 조견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기록으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倭의 존재는 漢武帝가 朝鮮을 정벌하고 그 뒤 樂浪 이하 4郡을 설치한 후에 알려졌다고 생각된다. 倭는 『說文解字』에 “順貌. 從人委聲”이라고 되어 있어 順從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일본인과 일본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 데에 대해서는 我(わが)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하는 설, 倭, 委는 イ로 읽으면 福岡縣(イト, 怡都)의 약칭으로 이토가 고대 일본과 대륙의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설, 東夷의 성질은 순종적이라는 생각에 東夷인 일본인을 倭라고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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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帶方) 주 002
각주 002)
帶方:帶方郡은 漢四郡의 하나인 眞番郡 소속 帶方縣이 설치되고(전108~107) 기원전 82년 樂浪郡의 속현이 되어 유지되다가 後漢末 遼東太守 公孫度의 영향하에 들어간 이후 公孫度의 뒤를 이은 公孫康이 강성해진 韓과 濊를 견제하고자 帶方縣을 중심으로 樂浪南部都尉 관할의 7縣(대방, 소명, 열구, 장잠, 함자, 해명, 제혜)을 帶方郡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帶方郡은 238년 魏에 예속되었고 다시 晉에 속하였다가 313년 樂浪郡이 고구려에 함락된 직후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대방군의 위치는 한사군 문제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한반도 내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황해도로 비정하고 있다.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로 보면 帶方郡의 郡治는 황해도 鳳山郡 石城里로 추정되는데, 발견된 성터에서 東漢에서 西晉시대 年號가 기록된 기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光和 5년, 泰始 7년, 泰始 11년 등 그리고 성터 북쪽에서 발견된 墓磚에 ‘使君帶方太守張撫夷磚’이라는 명문이 있어 郡治임을 증명하고 있다. 帶方郡 소속 昭明縣의 縣治는 황해도 신천군 토성리이며 이곳에서 ‘太康四年三月昭明王長造’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장금현은 신천군 봉황리인데, 이곳에서 ‘守長岑縣王君, 君諱鄉, 年七十三, 字德彥, 東萊黃人也. 正始九年三月廿日, 壁師王德造’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이곳이 장금현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타 동 시기의 토성 유적이 있으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다른 현치는 확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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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어 그 땅은 산림이 많고 좋은 밭은 없으며 해산물을 먹고 산다. 옛날에 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서로 인접해 있었으며, 위(魏)대에 이르면 삼십개국이 [와] 통교(通交)하게 되었다. 호(戶)는 칠만(七萬)이다. 남자는 성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스스로 태백(太伯)주 003
각주 003)
太伯:倭가 太伯의 후손이라는 말은 『魏略』에 처음 등장한다. 이와 관련된 『魏略』(『翰苑』에 인용)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女王之南·又有狗奴國·女男子爲王. 其官曰拘右智卑狗·不屬女王也. 自帶方至女國萬二千餘裏. 其俗男子皆點而文聞其舊語·自謂太伯之後. 昔夏後少康之子封於會稽·斷髪文身·以避蛟龍之吾. 今倭人亦文身·以厭水害也.” 그렇다면 太伯은 누구인가? 太伯은 周의 시조인 古公亶父의 長子이다. 商末에 古公亶父는 長子 太伯, 次子 仲雍, 막내 季歷 3명의 아들을 두었다. 季歷의 아들 昌(후에 周文王)을 보고 王業의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계력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했다. 아버지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두 아들은 왕위를 양보할 결심으로 岐山의 周原을 떠나 동남쪽으로 이동, 無錫 東南에 있는 梅里 일대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후 그곳 풍속을 따라 단발하고 문신하였다고 전한다. 古公亶父가 죽은 뒤에는 예정대로 季歷이 그 뒤를 이었고 太伯은 그 지방 사람들의 추대로 군주가 되어 ‘吳太伯’이라 불렸다. 太伯부터 19대 壽夢에 이르기까지 梅里를 도성으로 하였고 뒤에는 吳(현재 蘇州)로 천도하였다. 太伯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인 仲雍이 뒤를 이었고 周가 商을 멸망시킨 뒤 주왕조로부터 吳國君에 봉해져 列侯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太伯은 梅里 동쪽에 있는 皇山 남쪽 기슭에 매장되었는데, 後漢 永興2년(154) 4월에 桓帝가 吳郡太守 糜豹에게 太伯墓를 감수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太伯故城 안에 있던 오태백의 저택을 보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太伯은 吳國과 吳姓의 始祖로 추존되었다(이상의 내용은 『吳越春秋』 「吳太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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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손이라 하였다. 또 아주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모두 대부(大夫)라 자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하(夏)나라 소강(小康)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여 교룡(蛟龍)의 공격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주 004
각주 004)
이 구절은 처음 『漢書』 「地理志」 第八下에 “其君禹後, 帝少康之庶子云, 封於會稽, 文身斷髮, 以避蛟龍之害”라고 나온다. 이처럼 小康의 庶子가 會稽에 봉해진 뒤 그 지역 풍속을 따라 문신하고 단발하였다는 내용이다. 小康은 잘 알려지다시피 ‘小康中興’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夏나라 禹 임금의 아들 啓가 죽은 뒤 太康이 그 뒤를 이었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東夷族의 일파인 后羿가 太康을 몰아낸다. 太康이 죽은 뒤 中康이 그 뒤를 이었고 中康의 아들 相이 后羿를 죽이고 정권을 잡은 蹇浞에게 살해당하자 相의 아내는 임신을 한 채 도망가서 小康을 낳았다. 小康은 그 뒤 有虞氏에 기탁하여 그 두 딸과 혼인, 綸邑(현재 禹州 順店康城)에 정착하여 자신의 유민을 불러모아 힘을 축적, 마침내 寒浞의 일당을 물리치고 천하를 바로잡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일러 ‘小康中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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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倭人)은 잠수하여 물고기를 즐겨 잡는데, 인 역시 몸에 문신해서 해로운 바다짐승을 막고자 하였다. 그 위치를 따져 보면 회계군(會稽郡) 동야(東冶) 주 005
각주 005)
東冶:東冶는 『辭海』에 현재 福建省 福州市이며 漢高祖 5년 無諸를 閩越王에 봉하고 東冶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 바로 그곳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東冶는 또한 冶縣이라고도 하는데, 後漢 때에는 개칭되었고 會稽郡 所屬이었다가 晉代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辭海』의 이 설명에 대해 兩漢시대 會稽郡에는 ‘東冶’ 혹은 ‘東侯官’이 없다는 점, 冶縣은 後漢시대 章安현이라는 점을 근거로 冶縣은 현재 福建省 建甌市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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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 해당한다. 남자들은 가로폭이 긴 옷을 입었는데, 좌우로 서로 이어서 묶기만 하고 간략히 해서 봉제선이 없었다.주 006
각주 006)
이것을 복원한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복원도는 일본의 風俗博物館 사이트http://www.iz2.or.jp/top.html에서 복사. 가장 오래된 기록인 『魏志』 「倭人傳」의 기술에 따라 복원) 1. 가로폭으로 만들어진 두건, 2. 가죽으로 만든 목장식, 3. 가로폭으로 만들어진 옷, 4. 가죽으로 만들어진 각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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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홑옷[單被]과 같은 것을 입었는데, 그 중앙에 구멍을 내서 머리를 집어넣어 입는다.주 007
각주 007)
여성의 의복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출처는 上同). 1. 굴개로 묶은 머리, 2. 머리를 통과한 옷, 3. 목면으로 만든 허리띠, 4. 목면(혹은 마끈)을 손에 쥐다, 5. 가로폭의 腰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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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모두 산발하고 맨발로 돌아다닌다. 이 지역은 기후가 따뜻하여 관습상 벼와 모시, 삼을 심고 누에를 쳐서 실을 잣고 옷감을 짠다. 이 지역은 소와 말이 없으나 칼, 방패, 활, 화살과 같은 무기가 있으며 철로 화살촉을 만든다. 가옥이 있으며 부모 형제는 잠과 휴식을 위한 거처를 달리하여 지낸다. 먹고 마시는 그릇은 조(俎)와 두(豆)를 사용한다. 혼인 때에는 돈과 비단을 지참하지 않으며 의복을 갖춰 맞이한다. 장사지낼 때 관(棺)은 사용하지만 곽(槨)은 없으며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든다. 처음 상이 났을 때 곡을 하며 울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장례를 지낸 후에는 온 집안 사람들이 물에 들어가 목욕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없앤다. 그들은 대사(大事)를 거행할 때 뼈를 불로 지져 길흉을 점친다. 1년 사계절의 올바른 때를 알지 못하지만 가을 수확 때를 계산하여 일 년의 기준을 삼는다. 사람들은 백 세까지 장수하는 자들이 많으며 간혹 팔구십 세까지 산다. 나라에 여자가 많지만 음란하지도 투기하지도 않는다. 소송은 없으나 가벼운 죄를 범한 자는 그 처와 자식을 몰수하고 죄가 중한 자는 그 집안의 씨를 없애버렸다. 예전에는 남자가 왕이었다. 한(漢) 말에 인들이 난을 일으켜 서로 공격하고 싸우며 안정을 찾지 못하니, 이에 여자를 왕으로 삼았다.주 008
각주 008)
『漢書』 「地理志」에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고 하여 기원 전후에 倭가 1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國’은 郡 또는 郡의 1/2에서 1/3 정도의 범위 안에 드는 村들이 정치적으로 통합된 형태를 말하며, 그것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왕’으로 불렀다.(아사오 나오히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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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비미호(卑彌呼)이다.주 009
각주 009)
卑彌呼: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히미코를 말한다. 『魏志』 「倭人傳」에는 보다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婿,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라고 하듯이, 신을 접하는 무녀, 샤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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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倭人:중국 史書에서 日本人 또는 日本國을 부르는 명칭이다. 委라고도 한다. 唐代에 이르러 日本이라고 개칭하기 전까지 일본인들 자신도 중국과 교통하는 경우에는 倭라고 칭하였다. 『山海經』 海內北經에 蓋國이 倭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論衡』(卷8 「儒增篇」, 卷13 「超奇篇」, 卷19 「恢國篇」)에는 周왕조 때 조공한 국가로 기록되어 있지만, 『漢書』 「地理志」에 “樂浪의 바다 한가운데 倭人이 있다. 백여 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歲時마다 와서 조견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기록으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倭의 존재는 漢武帝가 朝鮮을 정벌하고 그 뒤 樂浪 이하 4郡을 설치한 후에 알려졌다고 생각된다. 倭는 『說文解字』에 “順貌. 從人委聲”이라고 되어 있어 順從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일본인과 일본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 데에 대해서는 我(わが)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하는 설, 倭, 委는 イ로 읽으면 福岡縣(イト, 怡都)의 약칭으로 이토가 고대 일본과 대륙의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설, 東夷의 성질은 순종적이라는 생각에 東夷인 일본인을 倭라고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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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帶方:帶方郡은 漢四郡의 하나인 眞番郡 소속 帶方縣이 설치되고(전108~107) 기원전 82년 樂浪郡의 속현이 되어 유지되다가 後漢末 遼東太守 公孫度의 영향하에 들어간 이후 公孫度의 뒤를 이은 公孫康이 강성해진 韓과 濊를 견제하고자 帶方縣을 중심으로 樂浪南部都尉 관할의 7縣(대방, 소명, 열구, 장잠, 함자, 해명, 제혜)을 帶方郡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帶方郡은 238년 魏에 예속되었고 다시 晉에 속하였다가 313년 樂浪郡이 고구려에 함락된 직후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대방군의 위치는 한사군 문제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한반도 내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황해도로 비정하고 있다.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로 보면 帶方郡의 郡治는 황해도 鳳山郡 石城里로 추정되는데, 발견된 성터에서 東漢에서 西晉시대 年號가 기록된 기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光和 5년, 泰始 7년, 泰始 11년 등 그리고 성터 북쪽에서 발견된 墓磚에 ‘使君帶方太守張撫夷磚’이라는 명문이 있어 郡治임을 증명하고 있다. 帶方郡 소속 昭明縣의 縣治는 황해도 신천군 토성리이며 이곳에서 ‘太康四年三月昭明王長造’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장금현은 신천군 봉황리인데, 이곳에서 ‘守長岑縣王君, 君諱鄉, 年七十三, 字德彥, 東萊黃人也. 正始九年三月廿日, 壁師王德造’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이곳이 장금현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타 동 시기의 토성 유적이 있으나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다른 현치는 확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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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太伯:倭가 太伯의 후손이라는 말은 『魏略』에 처음 등장한다. 이와 관련된 『魏略』(『翰苑』에 인용)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女王之南·又有狗奴國·女男子爲王. 其官曰拘右智卑狗·不屬女王也. 自帶方至女國萬二千餘裏. 其俗男子皆點而文聞其舊語·自謂太伯之後. 昔夏後少康之子封於會稽·斷髪文身·以避蛟龍之吾. 今倭人亦文身·以厭水害也.” 그렇다면 太伯은 누구인가? 太伯은 周의 시조인 古公亶父의 長子이다. 商末에 古公亶父는 長子 太伯, 次子 仲雍, 막내 季歷 3명의 아들을 두었다. 季歷의 아들 昌(후에 周文王)을 보고 王業의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계력에게 왕위를 넘겨주고자 했다. 아버지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두 아들은 왕위를 양보할 결심으로 岐山의 周原을 떠나 동남쪽으로 이동, 無錫 東南에 있는 梅里 일대에 정착하였다. 정착한 후 그곳 풍속을 따라 단발하고 문신하였다고 전한다. 古公亶父가 죽은 뒤에는 예정대로 季歷이 그 뒤를 이었고 太伯은 그 지방 사람들의 추대로 군주가 되어 ‘吳太伯’이라 불렸다. 太伯부터 19대 壽夢에 이르기까지 梅里를 도성으로 하였고 뒤에는 吳(현재 蘇州)로 천도하였다. 太伯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인 仲雍이 뒤를 이었고 周가 商을 멸망시킨 뒤 주왕조로부터 吳國君에 봉해져 列侯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太伯은 梅里 동쪽에 있는 皇山 남쪽 기슭에 매장되었는데, 後漢 永興2년(154) 4월에 桓帝가 吳郡太守 糜豹에게 太伯墓를 감수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太伯故城 안에 있던 오태백의 저택을 보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太伯은 吳國과 吳姓의 始祖로 추존되었다(이상의 내용은 『吳越春秋』 「吳太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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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이 구절은 처음 『漢書』 「地理志」 第八下에 “其君禹後, 帝少康之庶子云, 封於會稽, 文身斷髮, 以避蛟龍之害”라고 나온다. 이처럼 小康의 庶子가 會稽에 봉해진 뒤 그 지역 풍속을 따라 문신하고 단발하였다는 내용이다. 小康은 잘 알려지다시피 ‘小康中興’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夏나라 禹 임금의 아들 啓가 죽은 뒤 太康이 그 뒤를 이었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東夷族의 일파인 后羿가 太康을 몰아낸다. 太康이 죽은 뒤 中康이 그 뒤를 이었고 中康의 아들 相이 后羿를 죽이고 정권을 잡은 蹇浞에게 살해당하자 相의 아내는 임신을 한 채 도망가서 小康을 낳았다. 小康은 그 뒤 有虞氏에 기탁하여 그 두 딸과 혼인, 綸邑(현재 禹州 順店康城)에 정착하여 자신의 유민을 불러모아 힘을 축적, 마침내 寒浞의 일당을 물리치고 천하를 바로잡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일러 ‘小康中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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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東冶:東冶는 『辭海』에 현재 福建省 福州市이며 漢高祖 5년 無諸를 閩越王에 봉하고 東冶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 바로 그곳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東冶는 또한 冶縣이라고도 하는데, 後漢 때에는 개칭되었고 會稽郡 所屬이었다가 晉代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辭海』의 이 설명에 대해 兩漢시대 會稽郡에는 ‘東冶’ 혹은 ‘東侯官’이 없다는 점, 冶縣은 後漢시대 章安현이라는 점을 근거로 冶縣은 현재 福建省 建甌市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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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이것을 복원한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복원도는 일본의 風俗博物館 사이트http://www.iz2.or.jp/top.html에서 복사. 가장 오래된 기록인 『魏志』 「倭人傳」의 기술에 따라 복원) 1. 가로폭으로 만들어진 두건, 2. 가죽으로 만든 목장식, 3. 가로폭으로 만들어진 옷, 4. 가죽으로 만들어진 각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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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여성의 의복을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출처는 上同). 1. 굴개로 묶은 머리, 2. 머리를 통과한 옷, 3. 목면으로 만든 허리띠, 4. 목면(혹은 마끈)을 손에 쥐다, 5. 가로폭의 腰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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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漢書』 「地理志」에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고 하여 기원 전후에 倭가 1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國’은 郡 또는 郡의 1/2에서 1/3 정도의 범위 안에 드는 村들이 정치적으로 통합된 형태를 말하며, 그것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왕’으로 불렀다.(아사오 나오히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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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卑彌呼: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히미코를 말한다. 『魏志』 「倭人傳」에는 보다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데,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婿,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라고 하듯이, 신을 접하는 무녀, 샤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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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소강(小康), 비미호(卑彌呼)
지명
, 대방(帶方), 위(魏), , 하(夏)나라, 회계(會稽), , , 회계군(會稽郡), 동야(東冶),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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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倭人)에 대한 소개 자료번호 : jo.k_0005_0097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