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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倭國)은 백제 ∙ 신라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한(漢) 때부터 중국과 통교함

  • 국가
    왜국(倭國)
왜국 주 001
각주 001)
倭國: 고대 일본열도에 있던 나라의 이름. 원래 倭는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에서 일본열도 및 그 주민들을 일컫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漢書』(권28 「地理」 하 〈燕地條〉: 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하였고,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三國時代까지는 일본열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倭를 사용하였고 그 내부의 개별 소국을 가리킬 때는 倭奴國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南北朝時代에 이르면 倭國·倭國王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宋은 425년에 倭王 珍을 安東將軍 倭國王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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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의 동남쪽에 있는데주 002
각주 002)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각각 “帶方東南大海之中”, “韓東南大海中”으로 되어 있어 시대적인 변화와 따라 현재의 한반도를 가리키는 명칭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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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으로 3,000리이며,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산다. 위(魏)나라 때 통역을 거쳐 교통하였는데, 30여 국이주 003
각주 003)
『三國志』에서는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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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오랑캐[夷人]는 이수(里數)를 알지 못하여, 다만 날수로 [거리를] 헤아린다. 그 나라의 경계는 동서로 5개월을 가고 남북으로는 3개월을 가면 각각 바다에 이른다.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야미퇴(邪靡堆) 주 004
각주 004)
邪靡堆: 邪馬臺國. 『三國志』에는 “邪馬臺”로 되어 있는데, 『隋書』부터 “邪靡堆”라고 표기하기 시작하여 『北史』의 “邪摩堆”로 이어진다. 다만 『隋書』에서는 미(靡), 『北史』에서는 마(摩)로 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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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읍하고 있는데, 곧 [『삼국지』] 『위지(魏志)』에서 말하는 야마대(邪馬臺) 주 005
각주 005)
邪馬臺: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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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예전에는 낙랑군 경계와 대방군으로부터 12,000리 떨어져 있으며,주 006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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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會稽) 주 007
각주 007)
會稽: 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에 치소를 陽縣, 즉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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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쪽에 있는데 담이(儋耳) 주 008
각주 008)
儋耳: 儋耳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儋州市 일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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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서로 가깝다고 하였다.
한 광무[제](光武: 재위 25∼57) 때 사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였는데 대부(大夫)라고 자칭하였고,주 009
각주 009)
『後漢書』에서는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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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안제(安帝: 재위 106∼125) 때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왜노국(倭奴國)이라고 하였다.주 100
각주 100)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이라고 하였다. 光武帝 建武中元 2년(57)에 사신을 파견한 주체는 倭奴國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 사신을 보낸 것은 倭國王 帥升이라고 하였으므로 차이가 있다. 倭國王은 일본열도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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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환[제](재위 147∼167)와 영[제](재위 168∼188) 때,주 011
각주 011)
『三國志』에서는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이라고 하였다. 帥升이 生口를 바친 107년으로부터 70∼80년을 더하면 180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後漢書』에서는 倭國大亂의 시기를 ‘桓靈之間’, 즉 桓帝와 靈帝 무렵이라고 하였으며, 『太平御覽』에 인용된 『魏志』에서는 ‘漢 靈帝의 光和中’, 즉 178∼183년 사이라고 하였다(森浩一, 1985: 137). 『梁書』와 『北史』에서도 ‘光和年中’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靈帝의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桓靈之間은 중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나타내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므로, 『後漢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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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서주 012
각주 012)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본열도에서는 군사적인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高地性集落 혹은 環濠聚落 등이 발달하고, 머리가 잘리거나 돌화살촉 등이 뼈에 박힌 유골이 다수 출토된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이른바 倭國의 大亂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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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로 서로 공격하고 싸우니 여러 해 동안 군주(主)가 없었다. 비미호(卑彌呼) 주 013
각주 013)
卑彌呼: 히미코(日命, 日尊의 略稱) 또는 히메코(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야마대국이 大和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하고 있고, 야마대국이 九州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熊襲의 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조상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은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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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는데, 능히 귀도(鬼道)주 014
각주 014)
鬼道: 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의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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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무리를 현혹시킬 수 있어서, 이때 국인(國人)이 공립(共立)하여 왕으로 삼았다.주 015
각주 015)
『後漢書』에서는 “桓·靈間,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라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도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과 ‘귀도’로써 무리를 현혹시켰다고 한 것을 ‘귀신도’를 섬겨서 무리를 현혹시켰다는 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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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이 있어서 비미[호]를 도와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 왕은 시중드는 여자종[侍婢]을 1,000명을 두었으나, 그 얼굴을 본 자가 드물었다. 단지 남자 두 사람이 있어서 왕에게 음식을 바치고 말[言語]을 전달하였다. 그 왕은 궁실과 누관·성책주 016
각주 016)
城柵: 城은 흙을 版築法 등으로 견고하게 쌓은 것이고 柵은 나무로 빽빽하게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본열도에는 城이 없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도 木柵과 구덩이만 확인될 뿐이다. 부여나 진한의 경우도 성책은 토벽을 두른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柵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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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지고 있으며,주 017
각주 017)
궁실·누관·성책은 병렬될 수 있는 것이며, 城柵을 동사로 썼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를 앞으로 붙여서 구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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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무기를 가지고 지키며,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주 엄하였다. 위(魏) 주 018
각주 018)
魏: 三國 중 하나로 曹魏라고도 한다. 5대 46년간 지속되었다(2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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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제(齊) 주 019
각주 019)
齊: 南朝의 齊로 蕭齊라고도 한다. 7대 23년간 지속되었다(47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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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梁) 주 101
각주 101)
梁: 南朝의 梁으로 蕭梁이라고도 한다. 4대 56년간 지속되었다(50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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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서로 통교하였다.주 021
각주 021)
『三國志』를 비롯하여 南朝의 사서인 『宋書』·『南齊書』·『梁書』 등에 왜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신을 파견한 왜의 다섯 왕을 ‘倭五王’이라고 하며, 贊(讚), 珍(彌), 濟(齊), 興, 武가 그들이다. 劉宋의 高祖 武帝 永初 2년(421)과 太祖 文帝 元嘉 2년(425)에는 倭王 讚이, 443년과 451년에는 濟가 조공하였다. 462년에는 世子 興을 왜국왕으로 책봉하였으며, 같은 해 흥의 아우인 武가 왕위에 올랐으며, 478년에는 武가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상 『宋書』 및 『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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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倭國: 고대 일본열도에 있던 나라의 이름. 원래 倭는 唐代(618∼907) 이전에 중국에서 일본열도 및 그 주민들을 일컫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漢書』(권28 「地理」 하 〈燕地條〉: 1658∼1659)에는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이라 기재되어 있고, 이 기사에 唐의 顔師古는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이라고 注記하였다. 『三國志』에서는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고 하였고, 『後漢書』에서는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三國時代까지는 일본열도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倭를 사용하였고 그 내부의 개별 소국을 가리킬 때는 倭奴國과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南北朝時代에 이르면 倭國·倭國王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宋은 425년에 倭王 珍을 安東將軍 倭國王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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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三國志』와 『後漢書』에서는 각각 “帶方東南大海之中”, “韓東南大海中”으로 되어 있어 시대적인 변화와 따라 현재의 한반도를 가리키는 명칭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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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三國志』에서는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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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邪靡堆: 邪馬臺國. 『三國志』에는 “邪馬臺”로 되어 있는데, 『隋書』부터 “邪靡堆”라고 표기하기 시작하여 『北史』의 “邪摩堆”로 이어진다. 다만 『隋書』에서는 미(靡), 『北史』에서는 마(摩)로 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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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邪馬臺: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던 나라.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이며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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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三國志』에서는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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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會稽: 會稽郡이다. 이 군은 지금의 浙江省과 江蘇省에 걸쳐 있었다. 會稽郡은 秦代에 처음 설치되었고, 치소는 吳縣(지금의 江蘇省 蘇州市)이었다. 後漢 順帝 永建 4년(129)에 치소를 陽縣, 즉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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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儋耳: 儋耳郡으로서 지금의 海南省 儋州市 일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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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後漢書』에서는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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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後漢書』에서는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이라고 하였다. 光武帝 建武中元 2년(57)에 사신을 파견한 주체는 倭奴國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 사신을 보낸 것은 倭國王 帥升이라고 하였으므로 차이가 있다. 倭國王은 일본열도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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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三國志』에서는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이라고 하였다. 帥升이 生口를 바친 107년으로부터 70∼80년을 더하면 180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後漢書』에서는 倭國大亂의 시기를 ‘桓靈之間’, 즉 桓帝와 靈帝 무렵이라고 하였으며, 『太平御覽』에 인용된 『魏志』에서는 ‘漢 靈帝의 光和中’, 즉 178∼183년 사이라고 하였다(森浩一, 1985: 137). 『梁書』와 『北史』에서도 ‘光和年中’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기적으로는 靈帝의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桓靈之間은 중국에서 혼란의 시기를 나타내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므로, 『後漢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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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18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본열도에서는 군사적인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高地性集落 혹은 環濠聚落 등이 발달하고, 머리가 잘리거나 돌화살촉 등이 뼈에 박힌 유골이 다수 출토된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이른바 倭國의 大亂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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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卑彌呼: 히미코(日命, 日尊의 略稱) 또는 히메코(姬子)라고 읽는다. 新井白石은 ‘日御子’로서 天皇으로 간주하고 있다(『古史通或問』). 야마대국이 大和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日本書紀』에 기재되어 있는 神功皇后, 倭姬命 그리고 崇神天皇의 여동생 倭迹迹日百襲姬命(笠井新也) 등에 비정하고 있고, 야마대국이 九州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熊襲의 女酋, 『日本書紀』 神代卷에 보이는 火之戶幡姬兒千千姬命 및 ‘萬幡姬兒玉依姬命 그리고 土蜘蛛田油津媛의 조상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불어서 那珂通世와 白鳥庫吉 등의 지지를 받은 熊襲 혹은 隼人族의 女酋란 설도 있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1985: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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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鬼道: 일반적으로 ‘惑世誣民하는 術法’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신선사상, 보다 직접적으로는 후한 말에 유행하였던 張魯의 五斗米道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의 張魯傳에서는 漢中地域에서 교세를 떨쳤던 張魯에 대하여 “魯는 漢中에 거점을 두고, 鬼道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스스로 師君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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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後漢書』에서는 “桓·靈間,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라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도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과 ‘귀도’로써 무리를 현혹시켰다고 한 것을 ‘귀신도’를 섬겨서 무리를 현혹시켰다는 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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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城柵: 城은 흙을 版築法 등으로 견고하게 쌓은 것이고 柵은 나무로 빽빽하게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일본열도에는 城이 없었다. 현재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도 木柵과 구덩이만 확인될 뿐이다. 부여나 진한의 경우도 성책은 토벽을 두른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柵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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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궁실·누관·성책은 병렬될 수 있는 것이며, 城柵을 동사로 썼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를 앞으로 붙여서 구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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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魏: 三國 중 하나로 曹魏라고도 한다. 5대 46년간 지속되었다(2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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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齊: 南朝의 齊로 蕭齊라고도 한다. 7대 23년간 지속되었다(47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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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梁: 南朝의 梁으로 蕭梁이라고도 한다. 4대 56년간 지속되었다(50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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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三國志』를 비롯하여 南朝의 사서인 『宋書』·『南齊書』·『梁書』 등에 왜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신을 파견한 왜의 다섯 왕을 ‘倭五王’이라고 하며, 贊(讚), 珍(彌), 濟(齊), 興, 武가 그들이다. 劉宋의 高祖 武帝 永初 2년(421)과 太祖 文帝 元嘉 2년(425)에는 倭王 讚이, 443년과 451년에는 濟가 조공하였다. 462년에는 世子 興을 왜국왕으로 책봉하였으며, 같은 해 흥의 아우인 武가 왕위에 올랐으며, 478년에는 武가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상 『宋書』 및 『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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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한 광무[제](光武: 재위 25∼57), [후한] 안제(安帝: 재위 106∼125), [후한] 환[제], 영[제], 비미호(卑彌呼), 비미[호]
지명
왜국, 백제, 신라, 위(魏)나라, 야미퇴(邪靡堆), 야마대(邪馬臺), 낙랑군, 대방군, 회계(會稽), 담이(儋耳), 왜노국(倭奴國), 위(魏), 제(齊), 양(梁), 중국
서명
[『삼국지』] 『위지(魏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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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倭國)은 백제 ∙ 신라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한(漢) 때부터 중국과 통교함 자료번호 : jo.k_0013_0081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