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병합한 漢은 이 지역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縣으로 만들어 소속시켰다.
서기전 82년 漢은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고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와 濊는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에 예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하고 토착세력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쳐갔던 이들 郡들을 통틀어 東方邊郡이라 칭하기도 한다.
부여와 고려는 원래 현도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내 통제에서 벗어났고 韓과 濊는 한나라 말기에 낙랑군의 유민들을 많이 흡수하였다.
漢이 쇠락해지던 190년에 요동태수 공손탁이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을 칭하며 漢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공손탁은 부여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 들였고 낙랑군도 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 공손탁을 이은 아들 공손강은 고려를 침공하고 낙랑군에서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떼어 대방군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던 漢의 유민을 모으고 韓과 濊를 침공하여 대방에 복속시켰다.
漢 왕조를 이은 魏는 238년에 공손강을 이은 강손강의 아들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魏는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고 낙랑군과 대방군도 고려에 복속했던 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韓도 침공하여 복속시켰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魏를 이은 晋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 晋이 망할 무렵인 313년과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었다.
낙랑군은 중국에서 태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또 낙랑군에는 漢族이 많이 이주해 와 살았는데, 이것은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목간에 서기전 45년의 낙랑 인구 14%가 한족이었다고 되어 있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발달된 중원의 문화를 들여와 주변으로 퍼뜨렸다. 그래서 낙랑군이 존재했던 시기만을 놓고 볼 때는 낙랑군이 요흑사가 아닌 중국사에 속한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낙랑군이 이전의 조선을 이었고 또 이후의 고려에 이어진다는 전후의 흐름을 생각해 보면 낙랑군은 기본적으로 요흑사의 흐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요흑사의 다른 때에 비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기였을 뿐이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마한이 10만호, 변진한이 4-5만호, 야마대국이 7만호였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부여는 8만호, 고려는 3만호, 濊는 2만호, 동옥저는 5천호였다고 되어 있다. 변진한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마한은 한강 하류 지역을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 이남만 가지고는 그런 규모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기전 91년에 편찬된 사기에는 진번이 항상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과 인접한 동일 문화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록의 정황 상 조선의 남쪽에 있었다고 설정하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진번의 남쪽 경계는 신라가 한국통일을 완성하였을 때의 북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하게 된다.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난 뒤 임둔은 진번과 함께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 서기전 128년 濊君 남려는 위만조선을 배반하고 28만명을 들어 요동에 귀속하였는데, 이때 한나라는 그 지역을 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몇 년 후 폐지하였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도 설치하였다. 서기전 82년 한나라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쳤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치소를 옥저에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단단대령 동쪽은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마저 없애고 토착세력에게 자치권을 넘겨주었다.
임둔이 濊라는 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앞뒤의 정황을 볼때 임둔을 濊로 설정하면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게 된다. 그렇게 하면 임둔군은 이전의 창해군을 이은 것이 된다.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변진한이 4-5만호, 고려가 3만호, 濊가 2만호, 동옥저가 5천호였다고 되어 있다. 이런 濊의 규모에 맞고 기록에 나오는 정황에도 부합하는 지역은 영흥만 일대다. 그렇다면 단단대령은 철령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044 후한서(後漢書 445)
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245? 삼국지(三國志 289)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진한 8국은 처음에 진번군이나 임둔군에 소속되었다가 나중에 남부도위나 동부도위에서 빠진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철령과 태백산 사이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염사읍군 또한 정황상 이 지역과 가장 잘 어울린다.
동방변군이 있던 시기에 요흑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었다.
조선의 남쪽에는 진번이 있었고 동쪽에는 濊가 있었으며 북쪽에는 貊이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濊의 북쪽에 옥저가 있었고 貊의 북방에는 부여가 있었다. 부여의 동쪽에는 산림에서 살아가는 읍루가 있었고 서쪽에는 유목민인 선비가 있었다. 읍루와 선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사한 농경민이었다.
濊와 貊은 합쳐져 濊貊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강한 친연성을 암시한다. 고려는 貊人으로 인식되었는데 濊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또 동이의 옛 말에 의하면 고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였다. 부여의 도장에는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그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위만은 나라를 세우고 옥저를 복속시켰는데 이때 濊와 고려도 함께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