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遼
by Silla on 2020-03-26
요(遼)는 중국대륙이 당(唐)의 멸망 이후 5대10국의 혼란기에 빠져있을 때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세운 왕조다. (이때 한국에서도 신라에서 왕고로 왕조가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요(遼)는 동서로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926년에 병합한 발해도 포함된다.
발해를 병합할 때 요(遼)는 발해왕 대인선을 비롯한 발해의 지배세력들을 요(遼)로 데려가 요(遼)의 지배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일반 백성들도 다수 요(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옛 발해의 땅에는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요(遼)의 세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요(遼)는 200여 년 간 존속하다 1125년 금(金)에 망했다.
요(遼)는 2중적인 통치제제를 운영했는데, 유목민들은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리고 중국인과 발해인은 중국식 군현제도로 다스렸다. 이로 미루어 보아 거란은 중국은 물론 발해와도 매우 이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계통에 있어서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려-발해를 잇는 요흑사의 계통을 흡수했다고 자처하고 있었다.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蓋有存者。
요나라는 본래 조선의 옛 땅인데 기자의 여덟 가지 가르침이 풍속으로 전해져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주(周) 무왕이 갇혀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는데 이로 인해 그에게 조선을 봉해주었다. ... 한(漢)나라 초기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빈 땅의 왕이 되었다. 무제 원봉3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 당(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나중에 발해의 대씨(대조영)차지가 되었다. ... 태조(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워 발해를 공격하고 ...

요(遼)의 이런 인식은 고려계승을 내세운 왕고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099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
거란의 소손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을 쳐서 우리 선봉군사인 급사중 윤서안 등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서희가 군사를 이끌고 봉산군을 구원하려고 하니, 소손녕이 성명하기를,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강토의 경계를 침탈하니 이 때문에 정토한다." 하였다. 또 글을 보내 말하기를, “대조가 사방을 통일하는데 귀부하지 않은 자는 기필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와서 항복하고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니, 대국(거란)이 이 때문에 와서 토죄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데 말씨가 강개하니, 소손녕이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사실대로 거란 황제에게 아뢰기를,
“고려에서 이미 화친을 청하였으니 마땅히 전쟁을 중지합시다."
하였다.

소손녕의 요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요(遼)와 왕고의 역학관계에 걸맞게 왕고는 요(遼)를 섬겨라.
(2) 왕고는 요(遼)와 경쟁관계에 있는 송(趙宋)을 섬기지 말라.
(3) 고려의 옛 땅은 요(遼)의 것이니 왕고가 차지한 고려의 옛 땅을 요(遼)에 돌려 달라.

이에 대해 서희는 왕고가 고려를 계승하였으므로 고려의 옛 땅을 돌려줄 수 없으며, 오히려 지금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쫓아내고 그 땅을 왕고가 차지하게 해 준다면 여진에 막혀 하지 못했던 요(遼)에 대한 조빙을 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한다. 이것은 (3)을 양보하면 (1)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이 협상은 타결되어 요(遼)는 군대를 물리고 왕고는 압록강 이남의 땅을 차지한 뒤 요(遼)를 섬기게 된다.
(2)는 이듬해에 자연스럽게 실현되었다.

099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52)
원욱을 송(趙宋)에 보내어 군사를 얻어 지난해의 전쟁을 보복하기를 청했더니, 송(趙宋)은 북쪽 변방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송(趙宋)과 국교를 끊었다.

그런데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 타결된 이러한 협상결과는 요(遼)가 왕고의 고려계승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송나라와 대결하는 입장에서 요(遼)는 왕고와의 전쟁이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요(遼)가 왕고의 고려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왕고의 왕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0995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고려왕을 삼한국공에 봉하고 그의 아비를 고려국왕으로 추증했다.

1100 요사(遼史 1343 元 脫脫)
1099년 왕옹(王顒 숙종)이 책봉을 요청하였다. 1100년 옹(顒)을 책봉하여 삼한국공으로 삼았다.

국호를 고려라 칭했으니 고려국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려가 아니라 신라의 전신인 삼한으로 왕고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왕고가 내세운 '고려계승'은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고려계승이 가지는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런데 고려계승의 기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방 제국과의 영토분쟁에서 명분을 확보하는 데도 유용하게 작용하였다. 이것이 고려계승이 지니는 두 번째 기능이다.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왕씨왕조가 내세운 고려계승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정리하였다.
먼저 한국(韓國)이 아닌 고려를 한국의 신라 및 백제와 하나로 묶어 단일한 역사공동체로 만들었다. 또 원래 한국의 땅이었던 신라의 한주, 삭주 그리고 명주를 옛 고려의 땅인 것처럼 투사시켜 놓았다. 이것은 신라에서 나온 왕고가 고려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신라 안에 고려가 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려를 계승한 발해의 존재는 언급이 최소화되고 말갈국가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요(遼)와 금(金)으로 흡수되는 발해가 고려를 계승하였다면 왕씨왕조의 고려계승 주장이 무색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삼국사기 덕분인지 금(金) 이후로는 고려계승문제로 시비를 거는 나라가 최근까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