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국(高昌國)의 역사
고창국(高昌國)
주 001
각주 001)
은 한(漢) 시대 거사전왕(車師前王)
주 002의 땅이었다. 고창성은 그 지세가 높고 평평하고 인구가 창성한 데서 [뜻을] 취하여 이름을 삼았다. 북위[後魏] 초에 저거무휘(沮渠無諱)
주 003가 스스로 고창 태수(太守)가 되었다. [저거]무휘가 죽자 여여(茹茹)
주 004가 감백주(闞伯周)
주 005를 고창왕으로 삼았는데 고창에 왕이 있게 된 것은 이때가 시작이었다. 북위에서 수(隋)대까지 모두 와서 조공을 바쳤다. 당대(唐代)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후군집(侯君集)
주 006高昌國: 여기서는 9세기 후기부터 高昌回鶻 또는 西州回鶻로 불리던 위구르족 지배하에 있던 국가를 말한다. 9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위구르제국의 국세가 약해지자 黠嘎斯(키르키즈)수령이 스스로 가한을 칭하다가 840년에 회골 汗國을 무너뜨리고 黠嘎斯汗國을 건립하였다. 회골왕자 龐特勤이 15개 회골부락을 거느리고 고창 지역으로 西遷하여 고창회골 즉 서주회골을 세웠다. 焉耆, 龜兹 등 많은 도시를 병탄하고 龐特勤은 언기를 치소로 삼았다. 그 강역은 당조의 伊州, 西州, 庭州 및 언기, 구자 2개 도독부의 땅을 포괄하였다. 10~11세기에 오대, 북송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2세기에 西遼에게 예속되고, 13세기 몽골에 귀속되어 1320년대부터는 차가타이한국에 속했다. 17세기에 준가르부에 점령되었다가 18세기 중엽에 淸朝 관할로 들어갔다.
각주 006)
이 이 나라를 평정하고 이 지역을 서주(西州)
주 007라고 하였다. 안사의 난 때 이 지방이 함락되자 다시 국가를 회복하였다. 말이 와전되어 ‘고창(高敞)’이라고도 칭하며, 그 땅에 꽤 많은 회골인(回鶻人)이 있었기 때문에 회골이라고도 부른다.주 008侯君集(?~643): 중국 唐朝 초기의 장령이다. 豳州 三水(현재 陝西 旬邑北) 사람으로 『舊唐書』 卷69 및 『新唐書』 卷94에 立傳되어 있다. 수대 말부터 李世民의 막부에 있었고 玄武門의 變이 발생할 때도 이세민을 위하여 계획했던 그는 太宗 즉위 후에 左衛將軍·潞國公에 임명되었다가 右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貞觀 4년(630) 兵部尙書·檢校吏部尙書가 되어 실제로 宰相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貞觀 13년(639) 겨울에 후군집은 交河道行軍大總管이 되어 高昌王 麴文泰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고창국 도성을 함락시켜 그곳에 西州를 두었다. 그러나 고창 정벌 이후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는 죄, 모반의 의혹을 받고 결국 태자 太子 李承乾이 魏王 李泰와 대립했을 때 太子를 지지하여 兵變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각주 008)
현재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 분지에 있던 高昌에는 송대 고창회골 이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족들의 정권들이 있었다. 漢代에는 車師前國이 있었는데 이때 고창벽을 쌓아 흉노 침입을 막았다. 그 뒤 高昌城으로 불리고 5호16국 혼란기에 한족이 들어와 살게 되고 북위의 화북지방 통일 이후에는 서쪽으로 도주한 흉노족 출신 沮渠씨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車師國을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高昌國의 기원이다. 柔然의 속국으로 세워진 闞氏高昌(460~488 혹은 491)을 비롯해 張氏高昌(488 혹은 491~496), 馬氏高昌(496~501), 麴氏高昌(501~640) 등 四代의 한족 정권에 이어 640년 唐이 정복하여 고창현을 설치하였다. 840년대에 위구르제국이 키르키즈에게 멸망당한 후 西遷하는 가운데 일부가 고창을 점거하여 회골정권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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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高昌國: 여기서는 9세기 후기부터 高昌回鶻 또는 西州回鶻로 불리던 위구르족 지배하에 있던 국가를 말한다. 9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위구르제국의 국세가 약해지자 黠嘎斯(키르키즈)수령이 스스로 가한을 칭하다가 840년에 회골 汗國을 무너뜨리고 黠嘎斯汗國을 건립하였다. 회골왕자 龐特勤이 15개 회골부락을 거느리고 고창 지역으로 西遷하여 고창회골 즉 서주회골을 세웠다. 焉耆, 龜兹 등 많은 도시를 병탄하고 龐特勤은 언기를 치소로 삼았다. 그 강역은 당조의 伊州, 西州, 庭州 및 언기, 구자 2개 도독부의 땅을 포괄하였다. 10~11세기에 오대, 북송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12세기에 西遼에게 예속되고, 13세기 몽골에 귀속되어 1320년대부터는 차가타이한국에 속했다. 17세기에 준가르부에 점령되었다가 18세기 중엽에 淸朝 관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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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侯君集(?~643): 중국 唐朝 초기의 장령이다. 豳州 三水(현재 陝西 旬邑北) 사람으로 『舊唐書』 卷69 및 『新唐書』 卷94에 立傳되어 있다. 수대 말부터 李世民의 막부에 있었고 玄武門의 變이 발생할 때도 이세민을 위하여 계획했던 그는 太宗 즉위 후에 左衛將軍·潞國公에 임명되었다가 右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貞觀 4년(630) 兵部尙書·檢校吏部尙書가 되어 실제로 宰相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貞觀 13년(639) 겨울에 후군집은 交河道行軍大總管이 되어 高昌王 麴文泰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고창국 도성을 함락시켜 그곳에 西州를 두었다. 그러나 고창 정벌 이후 재물을 사사로이 취하였다는 죄, 모반의 의혹을 받고 결국 태자 太子 李承乾이 魏王 李泰와 대립했을 때 太子를 지지하여 兵變을 획책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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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현재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 분지에 있던 高昌에는 송대 고창회골 이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족들의 정권들이 있었다. 漢代에는 車師前國이 있었는데 이때 고창벽을 쌓아 흉노 침입을 막았다. 그 뒤 高昌城으로 불리고 5호16국 혼란기에 한족이 들어와 살게 되고 북위의 화북지방 통일 이후에는 서쪽으로 도주한 흉노족 출신 沮渠씨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車師國을 멸망시켰는데 이것이 高昌國의 기원이다. 柔然의 속국으로 세워진 闞氏高昌(460~488 혹은 491)을 비롯해 張氏高昌(488 혹은 491~496), 馬氏高昌(496~501), 麴氏高昌(501~640) 등 四代의 한족 정권에 이어 640년 唐이 정복하여 고창현을 설치하였다. 840년대에 위구르제국이 키르키즈에게 멸망당한 후 西遷하는 가운데 일부가 고창을 점거하여 회골정권을 건국했다.
색인어
- 이름
- 거사전왕(車師前王), 저거무휘(沮渠無諱), [저거]무휘, 여여(茹茹), 감백주(闞伯周), 후군집(侯君集)
- 지명
- 고창국(高昌國), 한(漢), 고창성, 북위[後魏], 고창, 북위, 수(隋), 서주(西州), 고창(高敞), 회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