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군이 광주에서..." 5·18 당시 신군부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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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기 교수, '그들의 5·18'서 접근
"신군부, 별도의 지휘권 행사하고
관련 자료 은폐,조작, 왜곡했다"
진상규명위활동 시작, 관심 높아져

지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선 옛 전남도청과 앞 광장은 1980년 5월의 역사 현장이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이 지난 5월 18일 이곳에서 처음 열렸다. 조선일보DB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에 따라 지난 1월 출범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직구성을 마치고 지난 달부터 본격 활동을 개시했다. 조사위는 활동기간 2년에 추가로 1년 연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연장할 경우 오는 2022년 12월말까지 활동이 가능하다.

이와 함께 5·18당시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1938~2016)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라고 회고록에 기록, 사자(死者)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 재판이 광주지법에서 진행 중이다. 북한군 침투설도 지속적으로 유포되고 있어,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뿐 아니라 광주를 모욕하고 있다는 비판적 여론이 형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광주(光州)에서는 여전히 진상규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5월 광주를 다룬 연구서가 최근 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기초교육대학)가 연구성과와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그들의 5·18-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푸른역사)이다. 저자는 지난 2005~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12·12와 5·18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관련자들로부터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노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군 창설기 연구-1945~50한국군의 형성과 성격’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했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이 책은 신군부가 박정희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을 역사적 흐름에서 살펴보고, 5·18을 신군부의 동태, 군부대 명령계통의 작동과정 등을 중심으로 5월의 상황을 분석하였다. 진상규명 차원에서 이 책이 제기한 사항중 핵심적인 몇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①다른 지휘계통이 작동했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50분쯤 광주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하던 800여 명의 학생들이 가톨릭센터 앞에 모여 “비상계엄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했다. 경찰이 시위 진압에 투입된 오전 11시40분쯤부터 “7공수여단 33대대가 출동예정”에 들어갔다. 정식명령은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31사단-7공수여단’의 계통으로 내려져야 했지만, 이 출동예정명령은 정식 명령계통을 통해 내려진 지시와는 달랐다. 노 교수는 다른 지휘계통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 명령이 보안사령부의 문서에만 보이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 보안사는 신군부의 핵심기관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여기에다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에 투입되기도 전에 서울에 있던11공수여단의 광주파병이 결정되었다. 광주시내 진압책임이 있는 전교사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내려진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18일 오전 내려졌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았다. 계엄사령부에서 작전명령서를 작성하던 시각인 19일 21시, 3공수여단은 광주출동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19일 오전 4시부로 광주지역에 배치된 공수부대의 작전지휘권이 31시간 96연대장에서 11공수여단장으로 바뀌었다.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 활동이 지역 계엄분소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의미로, 지휘권 이원화와 연관된다고 보았다.

② 전남도청앞 집단발포의 의문점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집단발포했다. 전교사령관은 이날 오전 8시를 기해 광주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비상경계태세인 이 명령은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발포할 수 있다. 게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분배된 것은 발포 명령과 같은 의미이다. 다만 누가 ‘진돗개 하나’를 내리도록 지시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날 오후 1시 무렵 전남도청앞 공수부대원들중 일부는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누가 이날의 발포명령을 내렸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전남도청앞 발포와 관련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노 교수는 지금까지 관련 자료가 발굴되지 않았다고 해서 발포와 관련된 명령서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누군가 발포와 관련된 자료들을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누가, 언제, 어떻게 관련 자료를 폐기하고 조작했는지가 5·18 진상규명에 꼭 필요한 숙제중 하나이다. 결과적으로 5·18의 핵심쟁점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노 교수는 지적했다.

③누가, 언제 ‘발포’를 명령했나
노 교수는 계엄군의 발포와 관련하여 사례를 들었다. 1980년 ‘사북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이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24일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발생, 11공수여단이 출동 대기했다. 당시 1군사령부는 “총기사용은 긴급시라도 총장 승인후”라고 명령서에 적시했다. 1987년 6월에도 “발포명령은 선 육군본부 건의후, 승인하 조치”로 명시되었다. 이에 따르면, 발포명령권은 현장부대의 지휘관(장교)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임의로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었다. 두 사례의 자료들은 남아 있다. 그러나, 5월 광주 발포와 관련된 자료들은 찾을 수 없었고, 지금도 발굴되지 않고 있다. 노 교수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5·18항쟁기간의 핵심자료가 없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5월 21일 새벽 4시30분 계엄사령부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노 교수는 “이 때 적어도 발포를 포함한 중대한 결정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진상조사위는 집단발포를 규명과제로 적시하고 있다. 조사위는 “총 9회의 조사가 있었으나 상급 지휘관 중심의 조사에 그쳐 발포 책임자의 규명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말단 병사와 초급 간부들을 포함한 ‘아래로부터’의 조사를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군문서로선 거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과도 통한다. 책임자 규명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④자료는 언제 조작되었나
그는 규명의 어려움을 자료문제에서 토로하고 있다. 5월 당시부터 조작을 했다며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들었다. 군은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교도소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조작했다. 전남합동수사단이 작성한 ‘광주교도소 습격기도사건’이다.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당시 류모씨는 예비검속된 조카(조선대 약대 재학)를 찾으려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고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YWCA부근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헀다. 당시 보안사령부는 ‘교도소습격사건’으로 둔갑시켰다.

1980년이 지나고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때 마다 이에 대응하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전두환 정부때인 1985년 6월 국가안전기획부 주관 아래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의 실무위원회는 ‘80인위원회’라는 위장된 기구에서 5·18관련 자료를 수집·검토했다. 이어, 1988년 13대 국회 개원(청문회 개최)을 앞두고도 정부와 군은 조직을 만들었다. 육군본부는 청문회에 대비하여 80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기구들에서는 5·18 관련 자료를 수집·검토하고 군, 그 중에서도 육군에 불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511연구위원회, 보안사령부는 511분석반을 설치했다. 511연구위원회는 군자료의 수집·정리뿐 아니라 군에 불리한 자료를 은폐, 왜곡했다. 출석예정인 증인들의 합숙까지 진행했다. 511분석반은 보안사령부의 개입을 감추려고 시도했다. 자료와 증인의 ‘세척’과정을 거치며 많은 자료들이 가려지고, 왜곡되었다. 이 때문에 5·18 관련 핵심자료들은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5·18의 진실을 밝히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노 교수는 지적했다.

노 교수는 여성과 미국, 보통사람들, 계엄군의 트라우마 등을 다루지 못했다며 과제들로 남겼다. 진상규명조사위가 조사하는 항목은 ▲최초발포와 집단발포의 책임자와 경위 ▲사망사건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행방불명자 ▲북한군 개입여부와 북한군 침투조작사건조사 ▲성폭력사건 등. 노 교수는 “5·18에 대한 진상조사는 단순하게 사실을 밝히는 데 머물지 않는다”며 “국가폭력과 군의 정치적 동원, 계엄령 등의 문제는 사실을 밝히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책임의 문제까지 제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조사활동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안이자 앞으로 더욱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요즘 다시 정치권에서는 진상규명조사위 활동기간연장과 역사왜곡처벌법 등을 제기하고 있다. 5·18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4월 27일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명예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가운데 두번째로 광주지법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조선일보DB


[권경안 기자 ga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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