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0 日本書紀(720)
by Silla on 2024-02-21
ᐥ足仲彦천황이 죽자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을 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는데 신라왕의 처가 재상을 유인하여 죽였다. 왜가 다시 쳐들어가자 신라인들이 신라왕의 처를 죽여 사죄하였다.ᐥ

譽田天皇을 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宇瀰라고 불렀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足仲彦天皇이 筑紫 橿日宮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沙麽縣主의 祖인 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 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穴戶直踐立이 바친 水田, 즉 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金·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表筒雄, 中筒雄, 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向匱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婦人이다. 어찌 速狹騰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表筒男·中筒男·底筒男 세 神이 황후에게 “우리 荒魂을 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穴門直의 조상인 踐立과 津守連의 조상인 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踐立을 荒魂을 제사지내는 神主로 삼고 穴門山田邑에 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穴門豐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坂王 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