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천왕은 돌아오지 않았다
by Silla on 2020-02-09
동천왕은 위궁(位宮)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에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고 나온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왕이 다른 곳으로 나가 있을 때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는데, 왕이 돌아와 보고는 "갈기가 없어 불쌍하구나"라고 말할 뿐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해 보았는데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가 망하고 위, 촉 그리고 오나라가 서로 경쟁하던 삼국시대였다.
고려는 인접한 위나라의 편을 들었는데, 오나라가 사신을 보내오자 그를 죽여 머리를 위나라에 보내주기도 하고 위나라가 공손씨를 토벌할 때는 천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위나라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데 동천왕은 갑자기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서안평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역사의 흐름은 크게 바뀌게 된다.
위나라는 한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성장했던 변방의 여러 세력을 다시 제압해 나가고 있었는데, 요동의 공손씨를 토벌한 데 이어 부여로부터도 복종을 받아냈다. 그런데 이때 고려가 서안평을 공격했으니 충돌이 불가피하게 됐다. 위나라는 낙랑과 대방으로 하여금 예(濊)와 한(韓)을 침공하게 하여 복종을 받아내기도 했다.
위나라는 먼저 부여로부터 군량미를 제공받은 뒤 고려를 침공하여 도읍이었던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위기에 처한 동천왕은 소수의 군사만 거느리고 압록강 상류 쪽으로 도주하였다.
삼국사기는 이때 동천왕이 남옥저까지 도망갔다가 거기서 위군을 물리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사기(1145)
동천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분산되어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의 유유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더불어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를 공격하니 위군이 시끄럽고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제외한 다른 사서들은 한결같이 위군이 읍루까지 쫓아갔다고 되어 있다.

양서(636)
관구검이 다시 공격하니 동천왕은 겨우 제가만 이끌고 옥저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장군 왕기에게 추격하도록 하여 옥저 천여리를 지나 숙신의 남쪽 지경에까지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기록하였다.

삼국지(289)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할 때 고려의 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옥저의 읍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명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동천왕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위군은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늙은 노인이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위군이 읍루까지 쫓아갔다면 동천왕은 어디까지 도망갔을까?
삼국사기에는 이듬해인 247년에 동천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248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어 이내 돌아온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기록을 의심해 볼 만하다.
수서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수서(636)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옥저로 쫓겨 갔다.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를 세웠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상의 나래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만들어준다.

혹시 동천왕은 돌아오지 못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