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 서여(箕子胥餘 기는 봉지, 서여는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子)이다. 주(周)ㆍ진(秦)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년(BC 195)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할 때 무리를 모아 추결(椎結 몽치머리)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이 비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을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줄지어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만주 혼강(渾江) 유역의 환인(桓仁) 지방으로 비정(比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ㆍ절노부(絶奴部)ㆍ순노부(順奴部)ㆍ관노부(灌奴部)ㆍ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玄菟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ㆍ의복ㆍ책(幘 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호적)을 맡아 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 군(郡)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 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歲時)에 받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이름하였는데, 고려 말로 성을 ‘구루’라 한다. 그리고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망(王莽)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후(侯)로 삼으니, 이 때문에 고려 사람들이 더욱 그의 국경을 침범했다.
광무(光武 동한(東漢)의 시조 유수(劉秀)의 묘호)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建武) 8년(32)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했다. 따라서 왕호(王號)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워 주었다.
안제(安帝 후한 제6대 임금) 이후에는 5부(部)의 민중이 번성하여 비록 다소 노략질하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으나, 곧 되돌아서 빈복(賓服)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는데 쇠약하여지매,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궁(宮)에까지 이르렀는데, 궁(宮 태조왕(太祖王))은 태어나서 바로 눈을 뜨고 능히 봤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다. 궁은 장성하여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동한 제5대 임금) 때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그리하여 백고(伯固 신대왕(新大王))까지 전하여 갔고 백고가 죽자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인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한(漢)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道)의 아들)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위궁(位宮 《삼국사기》에는 산상왕(山上王)으로 기록)을 세웠는데, 위궁 또한 용력(勇力)이 있어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궁(宮)이 출생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보았는데, 위궁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魏) 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쳐들어와 고구려를 무찌르고 숙신(肅愼 여진족의 고대 명칭)에까지 추격해 가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왔다.
위궁의 5대손 유(劉)가 진(晉) 나라 영가(永嘉 307~312) 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외(慕容廆 전연(前燕)의 무선제(武宣帝))와 이웃하였는데, 모용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크게 격파시켰는데, 뒤에 백제에게 멸망되었다.
그뒤에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안(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안의 손자 연(璉 장수왕의 이름)이 의희(義煕 405~418)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赭白馬)를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을 삼았다.
연(璉)의 7대손 원(元)이, 수 문제(隋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고,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동부(東部 순노부(順奴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
고종(高宗 당 나라 제3대 임금)이 또한 이적(李勣)을 명하여 가서 평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 고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갈라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며,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 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였고 따라서 그 민중 40만을 차지하여 읍루(挹婁)에 웅거하여 당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中宗 당 나라 제4대 임금) 때에 와서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조영으로 도독 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을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처음에 고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간(高侃)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들이 돌궐(突厥)ㆍ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가 이미 멸망되었으나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하였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었는데, 국왕(國王)의 성씨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장흥(長興) 2년(931)에 왕건(王建)이 나라 일을 권지(權知)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을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