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1281 壇君

燕나라의 衛滿은 -195+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왕조를 세웠다. 다른 고대 왕조처럼 衛滿 왕조 또한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8년에 한나라가 衛滿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하면서 통치에 권위를 부여하는 설화는 箕子 설화로 대체되었다. 이후 衛滿 설화는 지하로 들어가 무속신앙, 도교, 불교, 箕子 설화, 퉁구스 설화, 일본 설화 등과 결합하여 풍부한 이야기로 발전하였고 천여년이 지난 후에는 壇君 설화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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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설화의 형성
단군 설화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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壇君과 檀君
삼국유사는 제단을 뜻하는 壇을 써 壇君이라 했고 제왕운기는 박달나무를 뜻하는 檀을 써 檀君이라 했다.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은 일찍부터 나무를 신성시해 왔고 신라 금관 등을 통해 볼 때 그러한 문화가 한국으로도 흘러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달 나무가 이 이야기에 더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제단도 나무와 결합하여 壇樹의 개념이 되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저자가 각각 불교와 유학에 기반을 두었는데 壇君과 檀君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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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王之都王險
삼국사기에는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王儉)이 살던 곳인데 어떤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王之都王險)고 한다’고 되어 있고 사기에는 ‘위만이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王之都王險)'고 되어 있다. 두 기록에서 王之都王險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 점은 왕검 전설이 위만조선의 건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남겨준다. 그렇다면 王儉 또한 王險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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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箕子
삼국유사에 나오는 '주나라의 호왕이 즉위한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武王乃封箕子於朝鮮)'는 사기의 기록과 연결된 것이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되므로 여기에 연결된 단군 설화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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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唐髙, 周虎王
唐髙와 周虎王은 각각 -2357년과 -1046년의 사건에 나오는 인물들로 기록으로는 -479년경에 씌어진 논어에서도 확인된다. 기자 설화와도 엮여있어 기자 설화가 전래될 무렵 같이 따라왔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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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桓因
제석이라고도 하는 환인(桓因謂帝釋)은 불교경전인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석제환인(釋提桓因)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석제환인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데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한다. 제왕운기에는 釋帝와 함께 上帝桓因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상제는 고대 중국의 최고신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저자가 각각 불교와 유교에 기반을 두고 있에 이러한 차이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삼한 시대에 들어왔으므로 환인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기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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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3+ 風伯·雨師·雲師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그리고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는데 풍백, 우사 그리고 운사는 모두 중국 고대 설화에 나오는 존재들이다. 기록으로는 -475년경의 산해경에서 확인된다. 낙랑고려가 도교를 도입한 것은 643년의 일이나 風伯, 雨師 그리고 雲師 설화는 그 이전부터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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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降於太伯山頂
일본의 건국 설화와 단군 설화는 하늘의 자손이 내려와 땅 위의 왕이 된다는 공통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이야기는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물론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의 설화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두 설화가 기록된 시기가 500년 이상 차이가 나고 단군 설화는 기록되기 전에 존재했다는 흔적이 없기 때문에 단군 설화가 일본의 건국 설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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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熊과 虎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가지고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경쟁해서 전자가 승리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군 설화로부터 한민족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곰을 숭배하는 풍습은 퉁구스의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고 한민족의 정서는 견훤 설화나 왕건 설화에서 보듯이 호랑이와 보다 친숙하기 때문이다. 왕씨고려로 여진인이 흘러온 사례가 좀 있는데 이들을 통해서 곰과 호랑이 관련 설화가 들어왔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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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왕검 설화 모음
1145 삼국사기 仙人王儉 王險 ┆ 1281 삼국유사 檀君王儉 ┆ 1287 제왕운기 檀君 王儉城 ┆ 1325 조연수 묘지명 仙人王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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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ography - 국조
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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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설화
단군설화의 뿌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추정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왕검전설을 언급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위만조선 건국을 기록한 사기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하나의 가능성이 생긴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인데 어떤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王之都王險)고 한다’고 되어 있고 사기에는 ‘위만이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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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仙桃山 설화
▐ 삼국사기(1145)에는 김부식이 중국에 갔다가 들은 선도산 설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삼국유사(1281)에 와서는 이야기에 살이 붙고 특정의 산에까지 적용된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이는 단군설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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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단군조선설 설문
단군조선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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