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라의 술사가 그를 보고 ‘이 곳에서 살고 있으면 반드시 당나라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될 것이오.’라고 예언했다. 뒤에 두 딸을 낳았는데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로 얼굴이 예쁜데다 지혜와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 때 그의 언니가 오관산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오줌이 천하에 흘러넘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진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자 진의가, 비단치마로 꿈을 사겠다고 청하기에 허락했다. 진의가 언니에게 다시 꿈 이야기를 하도록 한 후 꿈을 움켜다가 품는 시늉을 세 번 하니 이윽고 몸에 무엇이 들어온 듯 움직거렸으며 마음이 매우 뿌듯했다.
당나라의 숙종(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려고 명황제(明皇帝) 천보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의 서포(西浦)에 이르렀다. 막 썰물 때가 되어 강기슭이 진창이 되자 따라온 신하들이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진흙 위에 깔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러한 연유로 후에 그 포구의 이름을 전포(錢浦)라고 했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로 있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응대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언짢아했다. 무종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습격을 받고 거의 숨이 끊어졌다가 깨어났는데, 선종은 몰래 궁중을 빠져 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겪었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언뜻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특별히 후대했으므로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의 속현으로 모두 동해에 연접하여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는 처지였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우려해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넜다.
당시는 당사(唐史)가 아직 편찬되기 전이어서 당나라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숙종선황제(肅宗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황제를 숙종선황제라 잘못 적은 것이다.
숙종이 송악군(松嶽郡)까지 오자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고,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자, 따르던 자가, 바로 그곳이 팔진선(八眞仙)이 사는 곳이라고 일렀다. 마아갑의 양자동(養子洞)에 다다라 보육(寶育)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숙종이 두 딸을 보고 좋아하며 옷이 터진 곳을 꿰매 달라고 부탁했다. 보육은 그가 중국에서 온 귀인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큰 딸에게 부탁을 들어주도록 시켰다. 그러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동생 진의(辰義)를 대신 들여보내 잠자리를 모시게 했다.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혹은 1년이라고 했다) 진의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고 작별하면서, 자신이 당나라의 귀족이라 밝힌 뒤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일렀다.
그 후 과연 아들을 낳아 이름을 작제건(作帝建)이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