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仇道·于老
① 味鄒가 왕이 된 후 94년이 지나 조카 奈勿이 왕이 되는 것은 어색하므로 味鄒의 즉위 연도를 60년 뒤로 물린다.
② 仇道는 172년부터 활동하다 190년의 패전으로 좌천되는데 그의 아들 味鄒가 322년에 왕이 되는 것도 어색하므로 仇道 관련 기록도 120년 뒤로 물린다.
③ 于老는 231년부터 활동하다 249년에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의 아들 訖解는 310년에 어린 나이로 왕이 된다. 이것도 불가능하므로 于老 관련 기록도 60년 뒤로 물린다.
2976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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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離山
仇道와 于老 관련 기록의 이동에 따라 그들 기록들과 함께 묶여 있는 사건들도 이동한다.
그러면 신라의 초기 팽창 과정이 자연스럽게 나열된다. 금호강을 따라 내려가다 낙동강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낙동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가 청주까지 팽창하던 백제와 만난다는 이야기다.
29760#3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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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5┆0165✘ 三國史記 百濟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탄로나자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그를 청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여러 성이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니,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29760#16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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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7.08✘ 三國史記 新羅
일길찬 흥선에게 명령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또한 직접 기병 8,000명을 통솔하여 漢水을 따라 나아가 이르렀다.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고 화해할 것을 요청하였다.
1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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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 三國史記 新羅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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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 三國史記 百濟
出兵襲新羅西境圎山郷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16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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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4✘ 三國史記 新羅
백제가 나라 서쪽에 있는 腰車城을 공격해 와서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利音에게 명령하여 정예병 6,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여 沙峴城을 격파하였다.
30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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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2✘ 三國史記 新羅
백제군이 牛頭州로 침범해 들어오기에, 이벌찬 충훤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자, 혼자 말을 타고 되돌아왔으므로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29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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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6✘ 三國史記 新羅
백제가 烽山城을 공격하자, 성주 직선이 용맹한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 일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3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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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1145) 百濟
遣使馬韓 告遷都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16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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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 新羅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倭人이 여러 차례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함께 도모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려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3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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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10 ❰❰⁴ 0064 三國誤記 新羅
다시 狗壤城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공격해 패주시켰다.
▐ 백제가 娘子谷城(청주)을 공격한 이듬해에 蛙山城(보은)을 공격하고, 또 그 두 달 후에 狗壤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狗壤城은 청주나 보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듯하다.
29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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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熊川柵을 세우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1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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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08 ❰❰² 0190 三國誤記 仇道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232 245 248 249➔250
3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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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초기 新羅의 영토 확장
▐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召文國(185 의성 仇道) → 甘文國(231 김천 于老) → 骨伐國(236 영천) → 達伐城(261 대구)의 순으로 확장했다고 되어 있으나, 먼 곳부터 먼저 병합하는 어색함이 있다. 구도와 우로의 연대를 60년 뒤로 물리면 骨伐國(236 영천) → 召文國(245 의성 仇道) → 達伐城(261 대구) → 甘文國(291 김천 于老)의 순이 되어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면 槐谷(255 괴산) 또한 315년으로 옮겨야 어울린다.
29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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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太平御覽(977~983)
진서에 이르기를 382년에 신라국왕 누한이 사신 위두를 파견하여 미녀를 바쳤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데 머리를 아름답게 늘어뜨린 사람이 많다. 길이는 한 장이나 된다.
부견이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하고 명칭이 바뀌었으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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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4.07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왕 巨連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었고 慶 또한 살해되었다.
16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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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1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彌秩夫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泥河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6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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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⁵ 0190 「三國誤記」 新羅
百濟㰍西境圎山郷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所敗 王以仇道失䇿 貶爲缶谷城主
백제가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기습 공격하고, 더 진격해 부곡성을 포위하였다. 구도가 정예 기병 5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공격하자, 그들이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구도가 와산까지 쫓아갔다가 백제에 패하였다.
왕은 구도의 실책이라고 여겨 缶谷城主로 강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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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⁵ 0190 「三國誤記」 百濟
出兵襲新羅西境圎山郷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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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4 三國史記 新羅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薩水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犬牙城을 지켰는데, 고구려 군사가 그곳을 포위하였다. 백제왕 牟大가 군사 3,000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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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 三國史記 新羅
고구려가 백제 雉壤城을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무리들이 무너졌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고마움을 표하였다.
1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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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三國史記(1145) 新羅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斯羅라고 부르거나 斯盧라고 부르고 혹은 新羅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29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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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2 ❰❰⁶ 0222 「三國誤記」 新羅
백제군이 牛頭州로 침범해 들어오기에, 이벌찬 충훤이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熊谷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게 되자, 혼자 말을 타고 되돌아왔으므로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29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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