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고려(樂浪高麗)
by Silla on 2021-03-01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려의 풍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결혼
삼국지(289)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고 신부의 집에서 동거하다 아들을 낳으면 가족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에도 동일한 내용을 요약해 놓았는데, 후한서는 기본적으로 220년에 망한 한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에 당대의 모습을 그렸다고 보기 힘들다.
수서(636)와 북사(659)에는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고 되어 있고 양서(636)와 남사(659)에는 연애를 자유로이 한다고 되어 있으며 수서(636), 주서(636), 북사(659) 그리고 신당서(1060)에는 신랑이 폐백을 바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다만 수서(636)와 북사(659)에는 신랑이 돼지고기와 술을 보낸다고 되어 있다. 수서 이후의 사서는 대체로 수서의 기록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전체 흐름을 보면, 미리 약속을 하고 결혼시키던 데릴사위 풍습이 자유 연애 결혼으로 바뀌었고 신랑이 많은 폐백을 바치던 풍습이 폐백을 금기시하는 풍습으로 변했다.
삼국지가 씌어질 당시 고려는 압록강 중류에 있었고 350여년 뒤 수서가 씌어질 당시 고려는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세월에 따라 풍습이 변한 것인가, 압록강 중류와 대동강 유역의 풍습이 다른 것인가?

2. 장례
삼국지(289)에는 결혼 직후부터 수의를 준비하고 장례에 재물을 많이 쓰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변에 심는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와 양서(636) 그리고 남사(659)에도 동일한 내용을 베껴 놓았다. 다만 양서(636)와 남사(659)에는 '곽을 쓰지만 관은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수서(636)에는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 부모 및 남편의 喪에는 모두 3년 服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3개월간 입는다. 초상에는 哭과 泣을 하지만 장사지낼 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한다. 매장이 끝난 뒤 죽은 자가 생존시에 썼던 의복과 차마를 모두 거두어다 무덤 옆에 두는데 장례에 모였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가져 간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은 북사(659)에도 베껴져 있고 신당서(1060)에는 상복에 대한 풍습만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3. 제사
해마다 10월이면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이야기는 삼국지(289)부터 시작해서 신당서(1060)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또 삼국지(289)에는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지낸다고 하고 후한서(445)에는 귀신(鬼神)·사직(社稷)·영성(零星)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는데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에 와서는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기자신(箕子神)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변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를 보면 고려는 독자적인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건국 신화는 중원의 기자가 조선으로 와 문명의 씨앗을 뿌렸다는 기자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국조가 두 사람 존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초기에는 기자 숭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고 사서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을 거쳐 낙랑이 되었다. 그 낙랑을 고려가 313년에 병합하고 427년부터 도읍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낙랑의 기자 숭배가 고려의 제사풍습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기자동래설은 한나라의 조선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 낙랑에 주입되었을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결혼과 장례의 풍습 변화도 낙랑 천도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호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뀐 것도 이즈음부터고 고분 벽화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4. 묘실벽화
한(漢)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중원의 무덤벽화는 한(漢)의 쇠퇴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북중국과 요동에서는 오히려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현재까지 10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대동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류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축조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연(燕)나라 출신 동수의 묘로 357년에 만들어졌고 옛 대방 지역에 위치해 있다. 고려의 무덤벽화에 나오는 수렵도, 씨름도, 사신도, 삼족오 등은 모두 중국에서 그 소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ᐥ낙랑 천도를 전후해서 고려는 풍습, 문화 그리고 국호까지 바뀌었다. 그래서 낙랑 천도 이후의 고려에 낙랑고려(樂浪高麗)란 이름을 붙여본다.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는데,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주로 낙랑고려 사람들이었을 것이다.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