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 인조 14년 섣달 8일(1637년 1월 3일), 청나라군 선봉대 300명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전쟁은 이듬해 정월 30일 끝이 났다. 47일간의 짧은 싸움. 조선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렸다. 우리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으로 손꼽히는 ‘삼전도의 치욕’이다. 조선은 왜 그렇게 무력했을까.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외적의 침략에 무방비였을까. 병자호란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은 대부분 당시 위정자들의 무책임과 무능력, 부도덕함에 대한 분노와 비난, 역사적 평가와 단죄 일색이다.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이 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선보인다.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이 싸운 전쟁이었으므로 ‘조선의 전쟁’인 동시에 ‘청의 전쟁’이다. 따라서 전쟁의 실상을 온전하게 규명하려면 청의 전쟁이라는 시각에서도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의 전쟁 실패만 봐온 게 지금까지의 병자호란 연구였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다면 청 태종 홍타이지는 왜 병자호란을 일으켰을까. 언제, 왜 조선 침략을 결심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며, 어떤 작전을 구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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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홍타이지는 황제가 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후금(後金)의 한(汗)이었던 홍타이지는 병자년이 되자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을 황제로 모시라고 요구했다. 조선은 거부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그해 4월 11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마침 심양에 머무르고 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에게도 삼궤구고두(三九叩頭)의 예를 강요했다. 두 사신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장대한 황제 즉위식은 요즘 말로 스타일을 구긴 셈이 됐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정복하고 몽고를 통일했으며 옥새를 획득했기에 (황제의) 존호를 받는다”고 하늘에 고했으나 사신들의 거부로 조선 정복의 허구가 드러났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조선과의 전쟁을 결심한 직접적 계기는 바로 이날 ‘미완(未完)’의 황제 즉위식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그러면 홍타이지는 얼마나 많은 군사를 동원했을까. 병자호란에 동원된 청군 병력이 12만8000명에 달했다는 게 현재의 통설이지만 이는 조선 측 문헌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한 허위 사실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청나라 자료와 만문(만주문자)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청나라 정규병력 2만2000명과 외번 몽고의 동맹군 1만2000명 등 참전한 청군 병력은 3만4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도 터무니없다고 반박한다. 당시 청나라 인구가 130만~24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인 포로가 그렇게 잡혀갔으면 최대 인구집단이 됐을 거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군의 전략이 속전속결이어서 포로 사냥에 열중할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홍타이지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는 친정(親征),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을 채택했다. 조선은 1차,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산성을 중심으로 공성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산성을 무시하고 통과하는 고속진군, 전격작전을 구사했다. 황제 즉위식이 있었던 4월 이후 곧바로 조선을 치지 않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 것도 강물이 얼어야 기마병이 신속히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청군의 전격 기습으로 인해 강화도로 파천해 지구전을 벌이려던 조선의 계획은 무산됐고, 결국 백기를 들어야 했다.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과의 종전협상에서 처음엔 느긋했던 청이 정월 17일부터 갑자기 협상을 재촉한 이유는 뭘까. 저자는 당시 조선에 창궐했던 마마(천연두)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몽고족, 만주족은 마마에 특히 취약해 홍타이지가 마마에 걸리지 않기 위해 협상을 재촉했고, 종전 직후 서울에 입성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근거를 전쟁이 끝난 뒤인 그해 7월 5일 ‘청태종실록’에서 찾는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평정한 뒤 서둘러 귀국한 일을 가리켜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避痘先歸·피두선귀)했다’고 직접 밝혔다. 마마가 전쟁의 향방을 바꾼 셈이다.

그러면서도 홍타이지는 인조가 직접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투항하는 출성(出城)을 고집하며 협상을 며칠이나 끌었다. 왜 그랬을까.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삼전도에서 완성하려 했던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도 밝혔듯이 책에는 기존 학설과 다른 주장이 많다. 이를 위해 저자는 조선과 청의 한문 사료는 물론 만문 사료까지 비교 검토하며 구체적인 숫자와 경로, 전쟁과 전투의 전개 과정 등을 깨알같이 분석해놨다. 그러면서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서술해 병자호란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