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북쪽으로는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힌'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고려는 백제의 漢城을 함락시킨 뒤 漢山 남쪽에 漢山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얼마못가 이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경덕왕은 이곳을 漢州로 바꾸었다.
그전에 고려는 漢水 이북을 차지하고 北漢山郡을 설치하였는데 신라는 이를 北漢山州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먼저, 漢山과 北漢山만 있고 南漢山이 없는 것을 통해 漢山이 먼저 생기고 北漢山은 나중에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漢山城이 아니라 漢城이라 한 것을 통해 이 성의 이름이 漢山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한서(82)에는 한사군 각 현과 강의 관계가 나와 있다.
浿水가 흐르는 지역은 현의 이름도 浿水 그대로 사용했지만 帶水가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帶方이라 했다. 列水가 시작되는 곳은 呑列이라 했고 바다에서 列水로 들어가는 입구는 列口라고 했다.
강의 이름과 지명이 帶나 列과 같은 공통의 명칭으로 묶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漢水와 漢城 그리고 漢山 또한 漢이라는 공통의 명칭으로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漢은 무엇인가?
한나라는 처음에 진번군을 설치하면서 치소를 삽현(霅縣)에 두었다. 이후 진번군을 폐지하면서 진번군의 15개 현 중 소명(昭明)을 포함한 7개 현만 낙랑군에 합쳤다가 나중에 이들을 다시 남부도위로 분리하면서 소명에 치소를 두었다. 이 소명은 황해도 신천인데, 훗날 고려는 이곳을 漢城이라 하여 별도의 도읍지로 삼았다.
그런데 한나라가 낙랑군의 치소를 낙랑토성에 두었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진번군의 치소는 어디에 두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 송파에 있는 풍납토성은 중국계 토성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낙랑토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이 진번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 아닐까? 그랬다면 漢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서 漢城이라 하였다고 설명이 된다. 남부도위의 치소가 있던 소명을 漢城이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漢城을 지나는 강을 漢水라 부르고 漢城의 뒤에 있는 산을 漢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