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철수는 시대적 과제
by Silla on 2020-03-26
2004년 이라크의 한 길가에서 목이 잘려진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시신은 이라크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한국인 김선일씨의 것이었다.
그 전에 한 이슬람 무장단체가 그를 납치하여 한국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자이툰 부대마저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었다.
한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그래서 김선일씨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이런 죽음을 각오할 만큼 부득이한 일이었을까?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은 이 일로 인해 '부시의 푸들'이라는 욕설까지 들었지만 정당성에 대한 뚜렸한 설명없이 파병을 강행했다.
그리고 미국이 이라크 침공의 이유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는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요컨대, 미국의 침공은 부당한 것이었고 한국의 파병은 '울며겨자먹기'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미국의 부당한 침공에 이처럼 동원될 수 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의 국방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한미군의 존재로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파병을 요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설사 요청을 했다고 하더라도 거절하기가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사르후 전투 -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이씨조선은 누르하치를 토벌하는 사르후 전투에 파병하였다.
조갑제 기자가 정리한 월남전 파병 이유
위키백과 - 자이툰 분대
위키백과 - 김선일
부시의 푸들 노무현의 모가지 -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진중권의 험담




Oded Balilty


한국사의 강중약국의 속성
한국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변화해 왔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반도적 속성인데, 반도가 일반적으로 다 그러한 것은 아니므로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강중약국(强中弱國)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륙세력은 역사상 중국대륙을 통치했던 중국, 몽골 그리고 요동의 여러 제국을 말하고 해양세력은 일본과 미국을 말한다.
한국사의 강중약국 속성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일찌기 신라, 백제 그리고 임나로 갈라져 있을 때부터 요동의 고려와 일본열도의 왜(倭) 사이에서 고전하였다.
한때 신라에는 고려군이 주둔하였었고 임나에도 왜군이 주둔하였었다.
신라와 백제는 각기 고려와 왜국에 인질을 보냈고 고려와 왜국은 각기 신라와 백제의 왕위 계승에도 개입하였다.
신라의 한국통일 이후에는 한동안 외세의 개입이 없었으나 왕씨고려 초기에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이에 복속하였다.
그리고 왕고 말기에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되었다.
왕고의 왕들은 원나라의 사위가 되었고 왕자들은 원나라에서 성장한 후 고려왕으로 책봉되어 부임해 왔다.
몽골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왕고는 여기에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이씨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한동안 평화를 누리다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왕은 의주까지 쫓겨갔다.
이때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군은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다시 한반도에서 밀려날 때까지 한동안 한국에 주둔하였는데 우리나라 동남지방의 해안가에서 많이 발견되는 왜성은 그 흔적이다.
그 얼마 뒤 이조는 다시 요동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복속하였다.
이조 말에는 동학난이 발생하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일본군도 같이 들어와 동학난을 진압하고 청나라 군대마저 격파하여 한반도를 장악하였다.
그 후 다시 러시아와의 해전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통치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에서 패하자 한반도에는 다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쪽과 북쪽에 들어와 주둔하였다.

한국사의 강중약국 속성은 한국의 왕조교체와 중국의 왕조교체를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신라-왕고의 왕조교체는 935년에 있었는데 이때는 중국대륙에서도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는 왕조교체의 시기였다.
왕고-이조의 왕조교체는 1392년에 있었는데 이는 중국대륙에서 원나라가 1368년에 세워진 명나라에 의해 쫓겨난 직후였다.
이조-일조의 체제교체는 1910년에 있었는데 이는 중국대륙에서 청나라가 망한 1911년보다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한국사를 관통하는 이 강중약국 속성을 두고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한다.

A. 강중약국 속성이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외세가 한국을 통치하는 명분으로 삼을 경우 (1)식민사관이 된다.
최근의 (2)미군철수반대 논리도 A와 맥락을 같이 한다.

B. 강중약국 속성을 지금부터라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지배도적들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경우 (3)주체사상이 된다.
우파의 (4)미군철수 논리도 B에서 나온다.
이 글은 (4)를 바탕으로 한다.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은 산업화 이후 격파되었지만 타율성론은 아직도 미군철수 반대논리에 멀쩡히 살아있다."

참고:
솔까역사 - 나라 사이의 이야기
조갑제 기자가 말하는 자주국방의 필요성


미군주둔에 대한 김조의 책임
미군이 처음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45년 대동아제국이 붕괴되고 한반도가 통치의 빈 공간이 되었을 때였다.
이후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5월까지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이 철수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것은 조선이었다.
1950년 6월 한국을 침략하여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멈춘 후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이때부터 미군의 영구주둔이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김조는 미군철수가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도록(?) 시시때때로 도발을 일삼았다.
http://goo.gl/D93Etf
겉으로는 미군철수를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군을 붙잡아둔 것은 김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미군철수가 가짜라는 것은 아래의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2000.06 김정일
“주한미군은 공화국(김씨조선)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너무 반미로만 나가 민족이익을 침해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http://qindex.info/d.php?c=2713




Sako Shahinian


국제정세의 변화
베트남 전쟁에서 피로를 느낀 미국은 1970년 '아시아 각국은 자국의 방위를 스스로 감당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http://en.wikipedia.org/wiki/Nixon_Doctrine
그리고 이듬해 한국에서 미국7보병사단 20,000여 명을 철수시켰다.
아직 김조에 대해 독자적 대응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한국은 미군의 추가적인 철수를 억지하는 한편, 자주국방도 도모하게 되었다.
또 1972년에는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고 연임제한도 없애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강력한 지도체제를 구축하였다.
1975년 미국이 발을 뺀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한국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는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미군철수를 추진하였다.

미국 제7함대·미국 7 공군과 군수지원만 있으면 대한민국 국군은 단독방어가 가능하다.
주변 4대 강대국 (중공, 일본, 소련, 미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싫어하며, 미국7보병사단이 일부 철수해도 충분히 북한을 억제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가 북한을 앞질렀다.
철군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을 현대화시키면 된다.
미국 7 공군은 가장 강력한 억지력이다.
http://goo.gl/jyyrdK

그러나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되고 한국의 반대가 심하자 1979년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념적으로도 공산주의에 대해 수세에 몰려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김조에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철수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81년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강화하였고 주한미군철수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이 군비경쟁에서 국력을 소진한 소련은 마침내 1991년 해체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대해 공세적 입장이었던 공산주의는 이 즈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추어 미국은 1991년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술핵무기를 철수시키고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지출하는 경비의 일부도 한국측에 부담시켰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한미군철수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im Youngwon


김조의 핵포기와 미군철수의 맞교환
핵무장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규 핵무장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은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또 이스라엘의 핵무장은 눈감아 주면서도 주변 아랍국가들의 핵무장은 용납하지 않는 등 이율배반적인 면도 있지만, 이것도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강요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거스르기는 힘들다.
따라서 현재 우리로서는 국제적인 핵확산 방지 규율에 따르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김조의 핵무장 포기에는 이런 부조리의 문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면도 있다.
바로 남북간의 현격한 국방비의 차이다.



이 국방비가 똑같은 효율로 사용되었다면 군사력의 차이도 당연히 현격하게 나게 된다.
한 군사력 평가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2013년 세계 군사력의 순위가 한국은 8위고 김조는 29위다.
2009년 국가정보원은 미군의 지원없이 한국의 현역군만으로 김조와 전쟁을 할 경우 한국군이 10%정도 우세하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 평가는 한국군의 최소 가정치와 김조군의 최대 가정치를 대입한 결과라서 실제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다 더하여 한국에는 한국의 국방비와 맞먹는 비용을 들이는 주한미군이 있다.
김조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조의 열악한 경제형편상 이와 같은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는 불가능하다.
지금도 과도한 군비부담에 충분히 고통스러워운 상태다. (2004년 국방비 부담이 GDP대비 25%. 한국은 3%미만.)



그래서 핵무장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 김조에 대해 군사력의 열세에 있었던 한국이 미군주둔에 집착했던 것과 같다.
미국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시도할 즈음 한국에서 핵무장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김조에게 핵무장을 포기하라고 하면 먹히지 않는다.
김조의 핵무장 포기를 유도하기 위해서도 미군철수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