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포 사건
by Silla on 2020-03-26
토전양량이 일본군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지금까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6-05-30)에는 토전양량이 매약상(賣藥商)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 기록에는 조선인에 의해 살해된 43명의 일본인 중에서 전신공, 군속(軍屬), 측량반원을 제외한 29명에 대해 조선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데, 토전양량은 이 29명에 포함되어 있다.
1997년 도진순 교수는 토전양량이 계림장업단(鷄林獎業團) 소속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참고로 당시 조선에는 다소의 일본인 행상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계림장업단은 그런 일본인 행상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외교사료관 소장 자료에는 토전양량이 그 계림장업단 항목에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07-29)에는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이 일어난 이후인 1896년 5월에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외교사료관 자료와는 분명 어긋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토전양량이 상인이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내용은 아니다.
고경문서는 1896년부터 1942년까지 항일투사를 취조한 기록을 모은 것인데, 여기에 치하포 사건을 취조한 기록도 들어 있다. 이 문서에는 김구가 "국민된 몸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 거사를 행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을 뿐, 토전양량이 일본군이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토전양량은 일본군이 아니라 일본 민간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당시 일본인 행상이 조선인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가끔 발생했기 때문에 칼은 호신용으로 차고 있었던 듯하다.
김구는 토전양량의 행색을 통해서 그를 일본군 첩자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군 첩자로 인식했었다고 설명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부분은 그의 마음 속을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토전양량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증오심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정황이 너무나 뚜렸하기 때문이다. 토전양량의 재물을 나눠가진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김구는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21세 때에 저지른 치하포 사건은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오점이다. 왜냐하면 토전양량은 민비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고 그의 목숨도 민비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