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배 세력의 이동
by Silla on 2021-01-27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은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자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실권이 없었던 왕으로 평가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면하고 '사평태상백'의 작위를 받았다. 677년에는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왔으나 말갈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682년에 죽어 위위경으로 추증되었다. 당나라는 686년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698년에는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에 봉해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그 이후에는 안동이 점차 나라를 이루어 818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치기도 했다.

고려말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은 연개소문이 죽자 대막리지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그러나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에 동생들이 정변을 일으켜 평양을 장악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이자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그리고 거듭 당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이에 연남생은 휘하의 국내성 등 6개성의 백성과 당나라 군사에 의하여 공략된 3개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그들과 합세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그를 ‘사지절요동대도독 상주국현토군개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고 고려 정벌군의 앞잡이로 내세워 평양성을 함락시킨다. 그 공으로 그는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제수되고 변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하여진다. 그 뒤 당나라의 수도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자 677년 그 관리로 임용되어 일하다 679년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산은 대막리지였던 형 연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는 틈을 타 작은 형 연남건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카 연헌충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연남생이 당군의 앞잡이가 되어 평양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였다. 그 뒤 당나라로부터 사재소경에 봉하여지고 당나라의 수도에 거주하였었는데 작위는 요양군개국공에 이르렀다.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은 아버지가 고려에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당나라는 그런 그에게 우무위장군이란 직함을 내리고 수레, 말, 비단 및 보도를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낸다. 이후 평양성이 함락되자 연헌성은 당나라로부터 우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우림위를 겸하였다. 그러나 후일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만다. 측천무후가 뒷날 그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개장하였다.

이렇게 당나라에 흡수된 연개소문의 후손들은 모두 성을 '연(淵)'에서 '천(泉)'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당나라 초대 황제 이연(李淵)과 글자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천남생, 천남산 그리고 천헌성의 무덤은 모두 낙양에 있다.

요약하면, 고려 왕조를 구성했던 지배세력은 대부분 당나라의 귀족이나 관리로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