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한국사가 아니다.
by Silla on 2020-02-09
발해가 한국사라는 주장은 이렇다.
고려가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그 발해는 고려계승을 표방하였으며 또 망할 때 왕자 대광현과 수만 명의 발해 유민이 왕고로 왔으니, 결국 고려의 역사는 발해로 이어졌고 발해의 역사는 왕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발해가 고려의 역사를 이었다는 부분은 맞는 말이다.
여기서는 발해가 고려의 역사를 이었지만 고려인의 나라는 아니라는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구당서(945)에 의하면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高麗別種)으로 당나라의 영주에 살다가 당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699년에 진국을 세운 것으로 나온다. 이 진국은 713년에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되면서 발해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신당서(1060)에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 말갈족(粟末靺鞨)이었다고 나온다. 걸걸중상은 고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이주해 있다가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에 의해 걸걸중상은 살해되고 그 아들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걸사비우의 무리와 함께 이해고의 추격군을 격파한다. 그리고 진국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당시 고려가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고려의 별종이란 표현은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 말갈과 모순되지 않는다.
설사 대조영이 고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백성의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면 발해의 정체성은 말갈이지 고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위만조선의 정체성이 연(燕)이 되지 못하고 온조가 부여계라고 해서 백제의 정체성이 부여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거의 모든 사서에서 발해를 ‘발해말갈’이라고 표현해 놓았다거나 구당서(945)와 신당서(1060)에서 고려, 백제 그리고 신라를 동이열전에 넣어 놓고 발해말갈은 말갈과 함께 북적열전에 넣어 놓았다는 사실을 보아도 당시 사람들이 발해의 종족적 정체성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종족적 정체성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것은 주류 세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고려에서 발해로의 역사 변화는 기본적으로 요동사의 흐름 내에 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한편, 발해 한국사설의 뒷부분, 즉 발해의 역사가 왕고에 의해 이어졌다는 부분은 잘못되었다.
발해는 926년에 요나라에 병합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민이 왕고로 유입되었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은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934년에 왕고로 망명하였는데 왕건은 그들을 환대하고 대광현에게는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발해가 왕고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발해의 왕족과 귀족의 대부분은 요나라의 귀족과 관리로 편입되었고 국토의 대부분과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백성의 대부분도 요나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할 때는 그러한 제3국으로의 소수 이탈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백제가 망할 때는 백성 12,000명이 왕과 왕족 그리고 고관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그렇다고 백제는 당나라로 계승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고려가 망할 무렵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고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이끌고 666년에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는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669년에 고려 주민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를 들어 고려는 신라로 계승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는 전체의 흐름에 비한다면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박옥걸 아주대 교수는 왕고시대에 귀화해 온 외부 사람들을 출신별로 분류했는데 발해인은 12만여 명, 여진족은 10만여 명 그리고 몽골인은 1만여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왕고로 흘러온 발해인을 근거로 발해가 왕고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한다면 여진도 왕고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말이 가능해지게 된다.

다종족국가 고려에 고려인이 있었듯이 다종족국가 발해에도 발해인이 있었다. 이 발해인은 발해가 망한 직후부터 요나라에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 한때 정안국을 세워 수십년간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인들을 요동으로 이주시켰는데 이 발해인들도 요양에서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1029년에 시도된 흥요(興遼)와 1116년에 시도된 대원(大元)이 그것이다. 왕고가 발해를 계승하였다면 요나라에서 발해를 재건하는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요컨대, 발해는 말갈 왕국이지만 고려를 계승하였고 요나라로 이어졌다.

물론 발해도 영토의 일부가 현재 한민족의 영역에 걸쳐 있고 일부 주민들이 왕고로 오기도 했으므로 한국사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에 비하면 발해는 한국사에 걸쳐져 있는 정도가 미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