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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대구지역사건 종합

2013.06.21 09:3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7637

<전쟁 전 정치적 학살>

 

1946년 ‘10월항쟁’으로 잘 알려진 대구에서는 1948년 5월 11일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5․10선거 전후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식량배급 등에 관해 이야기하던 주민 10여 명이 습격을 당했으며 이중 3명이 총살당했다.

 

여순사건 이후 대구에 주둔하던 6연대 군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 사이에 3차에 걸쳐 발생한 ‘대구 6연대사건’이 진압되면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팔공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산호(山虎)부대, 백골부대, 녹귀(綠鬼)부대’라는 국군이 주둔하면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형무소사건>

 

전쟁 전 대구에는 당시 경북경찰국, 대구경찰서, 남대구경찰서, 대구경찰국 특경대가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대구형무소에 3사단 22연대 소속의 헌병대원 20여 명이 주둔했다.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대구와 경산 등 인근지역에서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주민들이 이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대구형무소 재소자 1,438명과 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3일~9일, 7월 27일~31일 크게 두 차례에 걸쳐 3사단 22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주로 경산 코발트광산과 칠곡 신동재, 달성군 가창골짜기, 대구시 본리동에서 희생되었다. 한편,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대구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주로 경산 폐 코발트광산과 달성군 가창골에서 희생되었으며, 이외에 수성구 수성 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논공읍 남리 석밭 등에서도 희생되었음이 확인된다.

 

전쟁 발발 후 대구지역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들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이었다.

대구형무소는 2,000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49년 8월 재소자 수는 4,397명이었다. 절반 이상이 좌익수였고 대부분이 국가보안법위반자들이었다. 무기수와 15년형 이상의 장기수도 많았다. 「재소자인원일표」에 따르면, 1950년 6월 재소자 수는 기결수 1,397명, 형사피고인 2,315명, 피의자 52명으로 모두 3,889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쟁 직후에는 대구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까지 합치면 8,0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구에는 대구고등법원이 있어 전국의 죄수들이 항소를 위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여순사건 관련자와 제주도 주민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장기수였다고 한다. 한편, 동인동에 CIC 사무실이 있었고 CIC대원들이 지서별로 한 사람씩 파견되어 있었으며 섬유회관 맞은편에는 G2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CIC 대구파견대 사무실이 대구 소재 이비시아 백화점에 있었고, 육군본부 CIC 사무실이 대구 동성로에 있었다. 개전직후 형무소에 헌병대가 주둔했다. 헌병대는 형무소 안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2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대구육군형무소라고 불렸으며, 대구지구 헌병대가 형무소를 통제하며 형무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리했다.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안에 공장과 교회당을 모두 비워 사람들을 수용했다.

학살은 1950년 7월 3일부터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시작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크게 두 차례에 집중되어 저질러졌는데, 1차시기는 7월 3일부터 9일, 2차시기는 7월 27일부터 31일까지였다. 1차시기 사건에 대하여 「재소자인명부」(1950)에는 7월 3일부터 9일까지 모두 242명이 ‘군 헌병대에 인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중 211명이 7월 7일에 인도된 것으로 보아 이날 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차시기에는 인민군의 대구 접근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진주 이감’한다며 다시 군 헌병대에 인계하여 학살했다. 위 「재소자인명부」(1950)에 따르면, 이 시기에 모두 1,196명이 ‘군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박씨(박용득)의 증언을 통해 당시 재소자 300여 명을 트럭 5~6대에 태우고 대한청년단 등의 도움을 받아 칠곡군 신동재에서 재소자들을 총살한 사실과 이후 경산코발트광산에서도 재소자들을 총살한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총살은 대구형무소에 파견되었던 22연대 직할 헌병대원들이 저질렀는데, 형무관들이 재소자들을 데리고 오면 헌병들이 형무소 마당에 있던 트럭에 재소자들의 손을 뒤로 묶어 태웠고, 한 대의 트럭에 헌병 4-5명이 탔다. 형무소 근무자들은 사건 후 가족들이 면회를 오면 ‘진주로 이송되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진주형무소를 다녀온 가족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대구형무소1.jpg

(1951년 4월 대구형무소 재소자 학살.  헌병들은 고개숙이고 쭈그려 않은 재소자 뒤에서 머리를 쐈다. 이는 짧은 시간에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학살 매장하려는 의도로서 제노사이드의 전형이다)

 

<국민보도연맹사건>

 

대구형무소에서 재소자 학살이 시작되던 7월 3일경부터 대구, 청도, 경산, 영천 등의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었다. 이들은 7월 22일 등 7월 중순부터 8월까지 재소자들이 희생된 같은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이들 중 풀려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구와 경산 등 인근지역에서 연행된 주민들이 각 경찰서 유치시설과 대구형무소 등에 감금되었다가 경북지방경찰국 및 산하 대구지역 경찰서 경찰과 육군정보국 소속 경북지구 CIC 및 CIC 대구 파견대, 대구 주둔 22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총살되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대구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 장소는 경산코발트광산, 가창골짜기 등이었다.

 

대구형무소를 거쳐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의 수에 대해 판단할 문헌근거나 증언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형무소 수용자가 8,000여 명에 이렀고 이중 재소자가 4,000여 명이었으므로 나머지 4,000여 명이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모두 희생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재소자 희생자 수가 1,500여 명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 역시 최소한 1,000여 명은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대구형무소 기록으로 보아 전쟁 발발 초기 대구형무소의 재소자가 희생된 시기가 7월 3일부터 7월 31일까지로 확인되므로 이 시기 이후, 즉 8월 1일 이후의 희생자들은 예비검속된 지역 주민들로 볼 수 있어, 비록 희생장소는 같을 지라도 희생시기로 보아 신원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국민보도연맹사건에서 A급을 먼저 학살했다는 사실과 일정 정도 부합하는 결과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대구지구 CIC 문관이었던 이씨(이병필)에 따르면, 한국전쟁 직후 동인동 이비시아 백화점에 대구지구 CIC가 주둔을 하고 있었고 그 인근에 위치한 CIC 본부로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주민들이 잡혀와 조사를 받았다. 남대구경찰서 근무자 이씨(이길로)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소집과 연행은 사찰계가 담당하였으며 남대구 경찰서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였는데 이들은 이후 경산코발트광산, 가창골짜기, 대구시 본리동 등에서 집단처형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경북경찰국 근무자 노씨(노일출)에 의하면, 경북경찰국 사찰계 경찰들에 의해 청도 및 경북 일대 보도연맹원들이 경북경찰국으로 연행되어 왔으며, 일부는 대구형무소에 수용하되 일부는 경산코발트광산과 대구 가창 등에서 총살되었다. 주민들은 이후 경찰서 유치장, 대구형무소, 극장 등 여러 장소에 구금되었는데,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수용할 감옥이 없어 공장들을 모두 비워 수용할 정도였다. 대구경찰서 보안계 이씨(이봉상)는 “대구경찰서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을 어느 날 밤 트럭에 태우고 가창면 현장으로 데려갔는데 트럭 탑승시 보도연맹원들은 고개를 숙이게 하였으며 인솔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당시 가창 현장에는 큰 구덩이를 미리 파놓았으며 그 구덩이 속에 희생자들을 몰아넣고 총살을 했다. 현장에는 대구경찰서 뿐만 아니라 남대구 경찰서 근무자도 함께 있었으며 경찰 이외에 사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주로 경산 폐 코발트광산과 달성군 가창골에서 희생되었으며, 이외에 수성구 수성 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논공읍 남리 석밭 등에서도 희생되었음이 확인된다. 경북경찰국 특경대원 오씨(오만수)는 총살이 있은 후 특경대장의 지시로 특경대원 80명과 함께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가창골 현장을 확인하러 갔는데, 사건현장에는 3개의 구덩이가 있었으며 각 구덩이마다 100명 정도씩 모두 300여 명이 묻혀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국군 1사단은 상주지역에서 후퇴한 이후 8월 14일부터 30일까지 미 27연대와 함께 칠곡 가산면 다부리 부근, 칠곡 수암산 부근에서 전투를 치렀다. 8월 21일과 23일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 시내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행정부와 국회는 부산으로 피난했다.(한국전쟁사 3권 606쪽)

 

<좌익혐의 피해>

 

대구에서는 인민군 점령지역이 아니었음에도 좌익혐의 또는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1950년 9월 30일경 달성군 유가면 양동과 음동에 거주하던 이규명 등 10여 명이 유가면 용동 비슬산에 있는 대견사지(大見寺址)에서 부역혐의로 경찰에 의해 사살되거나 부상당했다. 사건 당시 전분선은 7발의 총을 맞았으나 권중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녀가 살아 돌아옴에 따라 유가족들과 마을 주민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경찰서는 1950년 10월 3일 대구공립공업중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였던 김희원을 체포하여 총살했다. 김희원에 관해 대구공업고등학교 사령부에는 9월 30일 면직되어 “사상혐의로 경찰에 구금 중”이라고 적혀 있다. 김희원의 처 남상숙은 1960년 4․19혁명 직후 결성된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회에서 활동하였다. 제4대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대구시 형사가 연행한 후 종 무소식으로 일시 장소 미상”으로 적혀 있다. 영천경찰서에서 발행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1979)와 『신원기록편람』(1981)에서 김희원은 대구 10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농민조합과 남로당 활동을 했고, 한국전쟁 당시 부역활동을 하여 10월 3일 총살당한 것으로 적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군위지역에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 신간회활동 등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던 유지상이 1940년 대구로 이주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대구경찰서에 수감 중 사망했다고 한다.(『2008 상반기조사보고서 1』, 49쪽) 희생시기와 정황으로 보아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가 아닌지 의심된다.

 

이상 대구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5. 11.

가창면 용계리

3

경찰

형무소

1950. 7. 3.~9.

경산 코발트 광산 등

242

3사단 등

7월 7일 집중

형무소

1950. 7. 27.~31.

칠곡 신동재 등

1,196

3사단 등

보도연맹

1950. 7. 22.~8월

가창골짜기 등

1,000

3사단 등

부역

1950. 9.~10.

비슬산 대견사지 등

10

경찰

 

 

 대구유족회1.jpg

(1960년 7월 28일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경북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