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사 뇌관 ‘칠지도’ 제작연도 369년 아닌 408년”

2009.10.13 17:54

홍성화 고려대연구원, 기존 통설 뒤집어 주장

“한·일 고대사 뇌관 ‘칠지도’  제작연도 369년 아닌 408년”

고대 한·일 관계 해석의 핵폭탄인 칠지도(七枝刀)가 기존 통설인 369년이 아니라 408년에 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홍성화 고려대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열린 한일관계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 칠지도에 관한 일고찰’)에서 “칠지도는 백제 전지왕(재위 405~420년)이 408년 11월16일 세자(구이신왕)의 탄생에 즈음하여 만들어 409년 사신을 통해 일본왕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칠지도는 6개의 가지와 몸통 윗부분의 날을 합해 7개의 검을 붙였다고 해서 이름 붙은 신검(神劍). 칠지도에 새겨진 61자의 글자는 한·일 고대사 해석에 파란을 일으켜 왔다.

한·일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綱七支刀○○百兵宣供供候王○○○○作/先世以來夫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일본학계는 <일본서기·신공황후 52년조>에 기록된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대목에 주목하여, 백제의 헌상설을 제기했다.

반면 한국과 북한학계는 1963년 북한학자 김석형이 “백제왕이 후왕(侯王·제후)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필두로 백제의 하사설을 제기했다. 이 ‘헌상설’ ‘하사설’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칠지도가 백제 최전성기인 근초고왕대(346~375년)인 369년 백제가 제작하여 372년 왜왕에게 주었다는 것은 한국학계의 통설. 명문 첫머리에 나오는 ‘泰○四年○月十六日丙午’ 가운데 ‘태○4년’을 중국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泰和) 4년’, 즉 369년으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명문 첫머리의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의 글자를 ‘오(五)’나 ‘육(六)’으로 판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즉 명문 제작시기는 ‘태화 4년 5(6)월16일 병오(丙午)일’이라는 것이었다.

적외선 사진에서 보인 새로운 글자 

일본학자 무라야마가 일본 NHK X레이 등을 토대로 별도 기재한 ‘십(十)’자와 ‘일(一)’자. 홍성화씨는 간지일을 토대로 맞춰본 끝에 칠지도가 408년 11월16일에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홍성화씨 제공

일본학자 무라야마가 일본 NHK X레이 등을 토대로 별도 기재한 ‘십(十)’자와 ‘일(一)’자. 홍성화씨는 간지일을 토대로 맞춰본 끝에 칠지도가 408년 11월16일에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홍성화씨 제공

그런데 재미있는 변화가 감지됐다. 1981년 일본 NHK가 촬영한 X레이 사진에서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보이는 글자는 ‘오(五)’나 ‘육(六)’이 아니라 ‘십(十)자’가 확연하게 보인 것이다. 또 하나, 96년 다른 일본학자 무라야마(村山正雄)가 펴낸 <칠지명도록>에는 77~78년 찍은 확대사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십(十)자 밑에 일(一)자가 보였다. 그러니까 칠지도는 ‘태○4년 11월16일 병오(丙午)’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계는 새로운 판독글자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성화씨는 새로운 판독결과 ‘11월16일 병오’가 확연하므로 이에 합당한 ‘일간지(日干支)’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4~6세기 사이 11월16일이 병오(丙午)인 날 가운데 408년, 즉 백제 전지왕 4년 때를 주목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396년) 백제가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 與倭和通)”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 전지왕 5년(409년) 왜의 사신이 와서 크게 우대했다”는 대목도 감안했다. 홍성화씨에 따르면 이 시기(396~409년 사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 어려움을 겪자 왜를 끌어들여 대응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홍씨는 백제가 군대를 파견해준 왜왕을 후왕(侯王)의 지위로 승인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이라는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백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히는 의미에서 칠지도를 하사했다고 보고 있다. 왜가 백제에 지원군을 보낸 이후 박사 왕인(王仁)을 파견한 것(405년)도 같은 칠지도 하사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태○’는 백제의 독자연호

그는 또 지금까지는 중국 동진의 연호로 파악됐던 ‘태○’가 백제 전지왕의 연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백제가 연호를 썼다는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광개토대왕)와 신라(법흥왕)가 독자연호를 쓰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씨는 이어 명문에 나오는 ‘기생성음(奇生聖音)’ 가운데 ‘성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불교용어라는 데 주목했다. 그럴 경우 ‘기생성음’은 “‘부처님의 가호’로 진귀하게 태어났다”고 해석될 수 있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가 침류왕 원년(384년)이므로 칠지도의 제작연도는 적어도 통설이었던 369년은 아니라는 게 홍씨의 주장이다.

고려대학원에서 ‘4~6세기 한일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홍성화씨는 “결국 칠지도는 408년 11월16일 백제 전지왕이 왕세자(구이신왕)의 탄생을 계기로 후왕(侯王), 즉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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