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통합되었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왕씨고려의 기록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에 여진이 나타나는데 東, 西, 흑수, 말갈 등과 조합하여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크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과 마운령 북쪽의 동여진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 그곳에 살던 예전의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는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가 망할 때 고려인 2만 8천호 또는 20만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이 인구는 주로 평양 주변의 사람들일 것이고 여기에 그들이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곳에 그대로 살면서 여진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고려계승을 표방한 왕고는 장백산 너머에서 오는 발해의 유민은 받아들이면서도 이들 여진과는 동질감을 가지지 않았다.
두 여진 중 서여진은 옛 맥(貊)의 자리에 있었다. 평양 성주 검용이 궁예고려에 귀부한 이후 왕씨고려는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청천강에 이르렀다. 이때 요하와 청천강 사이에는 생여진이 살고 있었는데, 왕고는 청천강 너머에 성을 쌓고 이어서 압록강 가에도 성을 쌓아 관문으로 삼으려다 여진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다. 그러나 요나라로부터 압록강 동쪽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뒤에는 그곳에 살던 여진을 몰아내고 영토로 삼았다.
한편, 마운령을 넘어 옛 예(濊)의 땅으로 접근해 오는 여진은 동여진이라 불렀다. 옛 옥저의 땅에서 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멀리 흑룡강 유역에서 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흑수 또는 흑수말갈을 동여진 또는 동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때로 조공을 하러 오고 때로는 침공을 하러 왔다.
맥(貊), 예(濊) 그리고 옥저와 함께 고려에 통합되었던 부여도 동일한 과정을 거치며 사라져갔다. 왕씨고려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발해의 15부 중 하나인 부여부를 통해 그 흔적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부여부가 있던 곳과 인접한 완안부에서 생여진에 의해 금나라가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