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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라지만…”

토지공개념에서 부동산공개념으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⑮] 투기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2007.03.15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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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⑥ 균형발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봉천동·사당동 등 산꼭대기 달동네에는 움막같은 집 하나에 서너가구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반면, 삼청동·성북동·방배동 등에서는 수십억원짜리 집에 초호화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유재산권이 보장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 하더라도 이 격차는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희갑 전 경제수석이 ‘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1988년 경제기획원 차관 시절부터 토지공개념 도입 작업에 참가한 후 이듬해 청와대에 들어가 경제수석 자리에 앉으면서 여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입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유재산권도 법에 의해 제한 가능
1989년 10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토지공개념 관련 3개 법안의 국회 제출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순 당시 부총리.

토지공개념의 저변에 흐르는 이 같은 생각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헌법 제23조 “사유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과 당시 공개념 도입에 적극적이던 여론의 지원에 힘입어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일부 위헌 판정 등으로 토지공개념 3법은 10년이 채 못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던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시정 연설에서 부동산값 안정대책으로 토지공개념 도입까지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또 다시 불이 지펴진다.
“지금 정부는 종합적인 부동산 대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강력한 토지공개념제도의 도입도 검토하겠습니다. 토지는 국민생활과 기업경영의 필수적인 요소인 데 반해서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일반상품과는 달리 취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도입 주장도

이후 토지공개념이란 말은 ‘부동산공개념’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그 해 11월5일 첫 회의를 시작한 민·관 합동의 부동산공개념 검토위원회가 주택거래허가제,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제 등의 도입을 위해 법 조문의 위헌성 여부와 시장에 미칠 파급 효과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제화는 여의치 않았고 개헌을 통한 공개념 도입 주장이 나오기에 이른다. 2006년1월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김근태 의원이 향후의 경제 모델로 제3의 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1년 뒤인 2007년2월에는 15년간 건설업체를 경영했던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이 부동산 공개념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과거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법은 반시장적이었다고 평가한 뒤 “토지불로소득은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대신 개인의 노력소득은 사유화하는 게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진정 시장친화적 부동산 공개념”이라고 주장했다.

2003년 11월 5일 오전 과천 정부종합청사 건설교통부에서 첫 회의를 시작한 부동산공개념 검토위원회에서 김정호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민 81%가 불로소득 환수 공감

우리 국민의 의식조사에 따르면 67.5%는 “재산증식을 위해 땅, 주택, 건물 등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81.4%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환수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부동산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초과이득은 사회가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인정하되 투기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태도다. 이는 국토연구원이 2006년 9월 중순, 전국의 30세 이상 70세 이하의 국민 1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나온 결과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억제·지가안정 종합대책발표를 1면에 다룬 1978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정책차원에서 토지투기에 대해 본격 대응한 시기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토이용관리법(1972), 8·8조치(1978)등의 투기억제대책 등이 이 때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줬던 개발용지공급과 이에 따른 불로소득 환수에 초점을 맞췄다. 투기억제정책의 형성기인 셈이다.

1980년대는 토지정책의 정비기로 불린다. 투기억제를 위해 토지거래허가제실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 신도시개발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는 토지시장 투명화를 위한 정책 단계로 들어선다. 초중반에는 시장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부동산실명제 도입과 토지종합전산망 구축이 추진됐고, 후반부터 2002년까지는 시장개방과 규제완화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며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중시하는 계획적 국토이용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례없는 호황, 대선 선심 남발…땅값 천정부지

부동산 공개념의 기원이라 할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게 된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공화국과 6공화국 초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5공화국은 '총외채 350억 불, 세계 5위의 채무국이지만 잠재 경제성장률은 7~8%대'라는 성적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1986년에 3저 호황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 등 잇단 국제대회 개최 등으로 생겨난 시중 유동성이 전년대비 연평균 20%내외로 크게 증가하며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을 촉진시켰다. 증권시장은 사상 유례 없는 활황을 맞았고, 토지가격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지가상승률은 1980년 11.7%를 시작으로 5공화국 동안 연평균 10.7%의 상승세를 보였다.

강력한 물가안정대책을 폈던 5공화국 시절, 당시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3.5%로 안정세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토지가격 상승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1987년 10월 정국은 대통령 선거체제로 돌입하면서 5공화국의 정책은 대선승리에 맞춰졌다. 정부와 여당은 대선 승리를 위해 떨어지는 주가를 잡기 위한 부양책과 국민주 보급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득표전이 치열해지면서 후보자들의 선심공약이 남발됐다. 동서고속전철, 강원권 국제공항 건설, 농어촌 부채탕감···. 공약남발의 꽃은 지방을 돌면서 발표하는 지역개발 공약이었다.

후보자들의 입에서 나온 공약은 바로 땅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임야, 무인도, 그린벨트 등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토지투기가 발생했다. 일례로 서해안종합개발계획은 당시 평당 8000원하던 녹지를 1만5000원까지 단숨에 끌어 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당시 상황을 활용한 경제개혁 공약을 발표한다. 1990년에 토지공개념, 1991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토지공개념이란 용어는 1978년 8.8 조치 때 건설부장관이던 신형식 장관이 국회에서 “토지의 사유개념은 시정돼야 한다. 건설부는 토지의 공개념에 입각한 각종 토지정책을 입안중에 있다”고 밝히면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공 출범시 ‘폭발 5분전’ 땅값

6공화국이 출범하던 1988년에는 2년 전부터 이어진 국제수지 흑자가 145억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경제와는 달리 사회·정치적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거대한 민주화 요구 그리고 노사분규의 일차적 매듭인 임금문제에 대해서 6공화국 정부는 점차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회안정 측면에서 부동산 문제에 대한 중요성이 또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사실 부동산투기문제는 6공화국 정부 출범이전에 이미 ‘폭발 5분전’이었다. 이 와중에 1988년 3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9월에는 올림픽이 열렸다. 막대한 자금이 시중에 또다시 풀렸다.

이 영향으로 1988년 전국과 6대도시의 지가는 27%, 서울은 28%나 상승하게 되고, 주택가격 역시 13%나 급등했다. 아파트 평당가 1000만원 돌파, 전·월세 파동으로 세입자들의 자살이 속출하던 사회적 불안을 극복하고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건설부와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돼 토지공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다.

건설부는 1988년 4월 13일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과 함께 토지소유상한제·개발이익환수제·등기의무제·과표현실화 등 토지공개념의 골격을 이루는 내용을 중심으로‘토지공개념확대와 투기억제대책을 위한 정책 세미나’를 열고, ‘토지정책의 운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4월 말 이현재 총리에게 보고했다.

같은 해 8월 경제기획원도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 법안을 입안하고 이를 토대로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등과 함께 토지공개념의 원리를 정책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토지공개념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지원하는 일은 연구기관, 대학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의 몫이었다.
반대를 한방에 잠재운 ‘5%가 사유지의 65% 소유’

1989년 경제기획원이 실시한 '토지공개념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국민들의 84.7%가 토지공개념의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도한 1989년 10월 21일자 중앙일보
걸림돌은 여당인 민정당 안에서 토지공개념 추진 세력을 사회주의자로 비난하며 반대하는 목소리였다. 반전은 여론을 통해 이뤄졌다.

1989년 5월에 마무리된 토지공개념 위원회의 최종연구 결과를 국토개발연구원이 발표하면서 당시 토지공개념 도입을 지지하던 여론이 다시 한 번 들끓게 되었다. “상위 2.8%의 가구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상위 5%의 계층이 65.2%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8년 당시 땅을 한 뼘이라도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자는 모두 1080만명이었다. 이 중 상위 5%인 54만명이 전체 사유지의 65.2%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는 이보다 앞서 “74~87년 동안 투자액 모두를 시설투자에 사용한 기업은 3.3배 성장한 반면 전액을 땅에 묻어 놓은 기업은 무려 10배나 성장했다”는 연구를 내놓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정당에서는 당과 상의 없이 여론을 자극하는 자료를 내보냈다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국민적 공분과 획기적인 부동산 대책을 원하는 비등한 여론 앞에서 결국 1989년 9월 7일 민정당 박준규 대표가 ‘정부의 토지공개념 입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국회 통과까지 1년여 부처-여당 줄다리기

하지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1년여 동안 관련부처나 여당과의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부처간 이견은 경제기획원·재무부·건설부 등 경제부처와 내무부 사이에서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율을 둘러싸고 극에 달했다.

토지공개념 3법의 국회 입법과정을 보도한 1989년12월13일자 조선일보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과표현실화율을 당시 15%에서 대폭 끌어올리려 했고, 내무부에서는 조세저항을 불러와 국가안보상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종합토지세에 대해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누진적으로 물리자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으나 세율에 대해서는 경제부처와 내무부·상공부 간에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도심지의 빌딩과 같은 영업용건물에 대한 과세율과 과세방법이 문제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던 토지공개념 도입작업은 1989년 6월 16일에 종합토지세를 신설하고 12월 30일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인‘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의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법’에 의한 토지초과이득세제, ‘개발이익환수에관한법률’에 의한 개발부담금제가 국회에서 입법화되면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개념제도 시행에 필요한 지가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 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됐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및 토지초과이득세제를 시행함으로써 당시 전국을 뒤덮고 있던 주택 및 토지투기 바람을 잠재우기 위한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의 작품

택지소유상한제와 개발부담금제는 각각 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 분과들의 연구결과를 제도화한 것이지만,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가 독자적으로 구상한 제도다. 당초 건설부는 개발이익환수법을 통해 개발지역에 대해서는 개발부담금을, 그 주변지역에 대해서는 개발이익환수금을 각각 부과하려 했으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개발이익환수금의 과징금적 성격과 가상이익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이의를 달았다.

대신 재무부는 종합토지세 강화를 주장했지만 내무부의 벽에 막힌 상태였고 별다른 대안이 없자 개발이익환수제를 재무부가 맡는 것으로 정리된다. 결국 재무부로 넘어오면서 이것이 토지초과이득세로 바뀐 것이다.

토지공개념제도 적용…‘재벌은 예외?’

토지공개념 3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시행까지 또 다시 적지 않은 애로가 있었다. 1990년 벽두부터 건설부에서는 토지공개념 실시에 따른 지가조사와 관리업무를 담당할 지가조사국이 신설되는 등 직제개편이 한창이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여론과 언론반응은 차가웠다.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 입법예고(1.15)를 앞두고 정부는 재벌기업의 골프장 허가 건으로 그리고 정치권은 3당 통합을 앞두고 잇단 토지공개념 약화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이다.

1990년 1월 초 언론들은 삼성·럭키금성·코오롱·동아 등 4대 재벌기업에 대한 신규 골프장 허가를 문제 삼으며 6공 정권존립의 이념적 기반의 하나로 강력 추진해온 토지공개념 확대도입 시책이 이 조치 하나로 제도시행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일제히 비난했다.

“재벌들의 땅투기가 골프장이란 미명으로 합법화되고 토지공개념은 힘없는 중산층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은행감독원이 89년 12월 초 은행 빚 많은 47개 계열기업군의 골프장 스키장 진출을 금지하는 여신관리제도를 규정했으나 시행일자를 늦춰가며 몇몇 기업에 사실상 예외조치 준 것이다. 30대 재벌이 88년말 4억2700만㎡, 금액으로 10조 500억원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1990.1.6)

3저호황 끝나자 성장기조로 선회

정치권에서는 1989년 3저 호황이 끝나고 경제성장률 하락, 수출증가율 둔화, 그리고 인플레이션 진행 등 경기하강의 조짐이 나타나자 집권 초 형평과 분배를 중시하던 정책기조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더욱이 1990년 1월 ‘3당 통합’을 계기로 성장주의 경제정책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정치권의 변화로 금융실명제 및 토지공개념의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 작업들이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박태준 당시 민정당 대표가 3당 통합과 관련한 기자간담회 중 “토지공개념 관련법안 등에 대한 시기선택이 잘 됐다고 보지 않는다. (중략)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이라도 급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동아, 1.25)”고 하는 등 토지공개념 연기 내지 완화 가능성을 연일 시사하고 있었다.

시민단체와 교수의 '토지공개념' 시국선언

정부와 정치권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경실련이 토지공개념 등의 개혁조치들이 극소수 기득권층의 저항과 이들에 의해 과장된 일부 부작용을 빌미로 늦춰지거나 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연이어 발표한다.

대학가에서도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과 시위를 통해 토지공개념 등 개혁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경제전문가들도 경제개혁조치를 후퇴시킬 경우 정국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잇달아 내놓았다.

위기상황의 불을 끄기 위해 정부 측에서 먼저 입장을 밝히고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30일 건설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권영각 장관에게 “금년에는 토지공개념 관련 법률을 차질없이 시행토록 하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 부동산투기가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라”고 토지공개념의 연내시행을 지시한다.
주택에 대한 갈증은 계속될 것이지만, 과거처럼 한 가구가 3~4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조순 부총리 “경제민주화 제도개혁 예정대로”

조순 부총리도 한 강연에서 “토지공개념 확대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90년대 한국경제의 전망과 대응방안,1990.1.30, 서울 롯데호텔)”는 의지를 밝힌데 이어 1990년 첫 경제관련 당정회의(조순부총리, 민자당 경제대책 6인)에서 토지공개념을 예정대로 추진할 계획임을 밝히고 당 측도 토지공개념 계획 불변 방침에 동의한다.

당시 이승윤 민자당 경제대책위원은 “이 자리에서 당 측은 종토세의 경우처럼 부작용이나 역기능이 생길 소지를 없애도록 보완에 힘써야한다고 지적했다. 보완책 마련이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한국일보, 1990.2.13)”는 말로 입장을 명확히 한다. 이렇게 하여 그해 2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이 채택·시행된다.

택지초과상한제도 위헌결정

하지만 1990년 3월 2일부터 본격 시행된 토지공개념 3법은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종이호랑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우선 ‘택지소유상한제’의 경우, 6대 도시외의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또 6대 도시 내 200평 이상 택지 보유자 신고대상은 6만2000명이지만, 실제 부담금이 부과된 택지는 1992년 1만5590건, 1995년 1만838건 등 총 2만6000여 건에 불과해 제도가 확대되지 않는 한 별반 실효성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부담금 부과실적도 1993년 3257억여 원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해 1997년까지 총 1조 3710억여 원이 징수됐다.

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은 제정이후 4차례 법률을 개정하며 유지되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부동산 매물 증가와 부동산 가격 급락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요를 촉진하고 공급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1998년 9월10일(시행령은 1998.9.25) 폐지됐다.

다음 해인 1999년 4월 29일에는 5년여의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로부터 면적·개인·적용시점 등에 대한 일률적 소유상한 적용 등이 헌법상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며 신뢰보호의 원칙 및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는 취지로 위헌판정을 받았다.

사적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는 헌법재판소의 이 판결은 다른 토지에 대한 규제입법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토지소유권의 공공성과 사회성이 전환점을 맞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락가락 개발부담금제

‘개발부담금제’는 택지개발, 공단조성, 골프장건설 등 30개 개발사업에 대해 개발이익의 25~50%를 부담금으로 과한 제도다. 1990년 5월 건설부가 확정한 개발부담금 부과대상은 9442만7000평, 건수로는 1021건이다. 이 중 건설중인 골프장이 87건, 3694만1000평으로 전체 대상의 39%를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도에 실제로는 부과된 개발부담금은 188건, 226억 9400만원에 그쳤다.

개발부담금은 이듬해인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부과됐다. 1991년 562건 1083억여 원, 92년 688건 1748억여 원 등 부과건수가 점차 확대되어 1998년 7월말까지 8478건 1조 2458억여 원을 징수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금융위기 이후 경제의 어려움으로 자금난이 심화되고 개발사업이 위축됨에 따라 1998년 9월 법률개정으로 통해 1999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개발부담금을 부과유예하고, 부과율도 50%에서 25%로 인하한다.

이후 2001년 12월 31일 ‘부담금관리기본법’에 따라 일시 운용을 정지했다가 2005년 12월 7일‘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부담금관리기본법’ 부칙 제3조를 삭제함으로써 2006년 1월부터 다시 부과하고 있다.

토초세의 운명

1994년 7월 28일 헌법재판소의 토지초과이득세 헌법 불합치 결정은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유휴토지 등의 소유자에 대해 3년 단위로 토지초과이득의 30%(1000만원 이하), 또는 50%(1000만원 초과)의 세금을 물리고자 한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중 과세로 재산권 침해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94년 7월 헌법불합치결정을 받았다.

이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①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를 비롯하여 ② 기준시가의 산정방법 위임, ③ 지가의 계측수단, ④ 지가가 하락한 경우 보충적 규정의 부재, ⑤ 50%의 단일비례세, ⑥ 소유제한범위 내 택지와 관계없는 과세, ⑦ 유휴토지에 임대토지의 포함, ⑧ 일부만 양도소득세에서 공제하는 것 등의 사항을 판시했다.

이후 ‘토지초과이득세제’는 외환·금융위기 이후의 부동산 경기침체,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 동일물건에 대한 이중과세 등의 문제점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결정 등으로 인해 1998년 12월 28일 폐지됐다

부동산공개념 시대로…불로소득 원천 차단, 공익과 사익의 조화 추구
토지공개념 도입 이후 1990년 20.6%나 상승했던 지가는 1991년 12.8% 그리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1992년 ­1.27%, 1993년 ­7.38%, 1994년 ­0.57%)하며, 2001년까지 매우 안정적인 추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과는 토지에 대한 투기를 막고 가격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요관리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1986년 이후의 호황이 3년만에 끝나고 미국의 통상압력과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과 1991년 들어 경상수지가 각각 22억 달러와 87억 달러의 적자를 보이며 경기가 침체된 데도 원인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지가안정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래도 땅값이 떨어지고 가수요가 줄어드는데 토지공개념이 적지 않게 기여를 했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부작용도 있었다. 토초세를 피하기 위해 유휴지를 가진 지주들이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어대는 바람에 주택200만호 건설과 시기가 맞물리면서 자재난, 인력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릴 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놀이터였던 공터나 동네 테니스장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또한 토지공개념이 비록 투기억제정책의 종합이라 할 수 있으나 시장기능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고 직접적인 강제성을 띤 제도였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

토지소유를 이용 위주로 인식바꿔야

토지공개념 도입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1989년11월30일 제작된 '투기와 토지공개념'이라는 제목의 <대한뉴스> 영상의 한 장면.
가용토지 전국토의 4%,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1인당 집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이 일본 27평, 대만 17평인데 비해 우리는 14평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토지이용 문제는 심각한 실정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경제발전, 도시화, 공업화로 지역간·계층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또 땅에서 생겨난 불로소득과 한탕주의는 대다수 국민에게 허탈감과 좌절감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고 있던 상황에서 토지공개념이 탄생했다.

토지공개념 3법 중‘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토지의 사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다.
건설부 토지국장으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규황씨는 1990년대 중반 “토지공개념의 효과를 단순히 땅값안정에서 찾아서는 곤란하다. 이것이 토지소유에 대한 인식을 이용위주로 바꾸는데 기여했는가 그리고 토지소유구조의 재편을 이뤄낼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실록 6공 경제)고 말했다.

토지의 소유집중도가 토지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제공했듯이 현재 주택의 소유집중도 역시 주택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형성했다. 부동산공개념을 통해 소유 및 개발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환수, 이용 기회의 형평추구,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 5만여 세대가 주택 20만호 소유
2005년 7월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토지정의시민연대회원들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당시 주택시장의 상황은 1989년 토지공개념이 검토되던 시기의 부동산 시장 상황과 비슷하였다. 셋집도 없어 방 한 칸을 임대한 세대가 100만을 상회하는데, 전체가구의 33.2%인 276만 세대가 814만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2003년 행자부 통계)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경우 44만 세대가 141만호의 주택을 소유함으로써 평균 3.24호를 소유하고 있고, 강남에서만 5만 5세대가 20만호의 집을 소유, 평균적으로 3.67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다주택 소유자로 하여금 주택을 팔게 하거나 다주택을 소유하는 데 따른 합리적인 부담을 매기는 것이 주택의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고 투기적 가수요를 억제하는 첫걸음이라고 보고 있다. 즉, 주택시장에서의 소유편중을 바로 잡고 주택이 지나치게 상품화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10.29 대책’에서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 방침으로 연결됐다.

토지공개념은 주택부문까지 확대

또 주택 매매를 통한 불로소득을 막기 위해 주택거래신고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 실거래가에 근거한 양도소득세 부과제가 도입돼 시행됐다. 재건축 개발이익환수, 실거래가 과세, 보유세 강화도 값비싼 주택을 소유한 가구는 대가를 내고 주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좋은 점(amenity)을 향유토록 한다는 점에서 불로소득 환수와 맥을 같이 한다.

국토연구원 이수욱 연구위원은 “참여정부는 노태우 정부에서 도입했던 필수재로서의 토지에 대한 공개념을 주택부문까지 확산해 소유편중을 시정하고, 개발과 거래· 보유에 따른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방식으로 다주택자가 보유하고 있는 주택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나오도록 함으로써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5년 인구총조사 결과, 전 가구의 16%인 255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주거시설에 거주하고 있다. 주택 자가보유율도 55.6%로 그다지 높지 않다. 주택에 대한 국민적 갈증은 계속될 것이지만, 과거처럼 한 가구가 3~4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주택도 토지처럼 과다한 소유에는 정당한 부담이 따라야 한다.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택에서 과도한 수익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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