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스스로 조선의 후예를 자처했으나 전주이씨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왔다는 주장과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도 있어 명확하지 않다. 시조 이한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때 사공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한의 18세손 이안사는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이 객관에 들었을 때 관기의 문제로 인하여 주관과 틈이 생겼다. 주관이 안렴사와 함께 군사를 내어 해치려 하므로 삼척현으로 피해 갔다. 그러나 전일의 그 산성 별감이 그곳의 안렴사에 임명되어 이르려고 하므로 가족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의주에 가서 살았다. 이에 고려는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고주를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쌍성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고 원나라 산길 대왕이 와서 쌍성에 주둔하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므로 (이때 조휘와 탁청이 화주 이북 지방을 몽고에 넘겨주고 각각 총관과 천호로 임명되었다.) 이안사는 김보노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그리고 종가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이안사는 그곳에 있지 않고 시리를 거쳐 개원로 남경의 알동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이때가 1254년이다. 이듬해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알동 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1274년에 이안사가 죽자 이듬해에 이행리가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 받았다. 이행리는 1281년에 천호소의 사람을 뽑아 데리고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토착 세력의 반감을 사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자 사람들을 데리고 두만강 가운데의 섬에 들어가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든 배를 타고 1290년에 의주로 돌아왔다. 이행리는 1300년에 승사랑에 제수되어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다스리는 다루가치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행리가 죽자 아들 이춘(발안첩목아)이 관직을 이어받았는데 박씨 부인에게서 이자흥(탑사불화)과 이자춘(오로사불화)을 낳았고 조씨 부인에게서 완자불화와 이나해를 낳았다. 1342년에 발안첩목아가 죽자 탑사불화가 관직을 이었는데 그도 몇 달 후 죽었다. 이에 조씨 부인이 이나해로 하여금 관직을 잇게 하려다 원나라의 분노를 사 이나해는 죽임을 당하고 이자춘이 우선 관직을 이어 탑사불화의 아들 교주가 성장할 때까지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교주는 성장한 후에도 관직을 돌려받지 않았다. 1356년에 공민왕이 유인우로 하여금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게 하자 이자춘은 사람들을 데리고 이에 동참하였다. 조휘의 후손 총관 조소생과 탁청의 후손 천호 탁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다.
이성계는 왕고의 장수로 있다가 1392년 공양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왕고의 왕족들을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에 몰아넣었다가 2년 후 이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켜 버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왕씨의 제사를 담당하는 왕우 삼부자밖에 없었다. 왕우는 공양왕의 동생인데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을 해서 이성계와는 사돈지간이었다. 이어 전국에 걸쳐 왕씨 색출작업을 벌여 발견되는 대로 목을 베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고 성을 전(全), 옥(玉)등으로 바꾸어 숨어 살게 되었다.
새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조선과 화녕 중에서 어느 것을 국호로 해야 하는가?'라고 명나라에 물어 이듬해 조선을 쓰라는 답을 얻게 되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조선계승을 표방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처럼 왕고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국호도 조선으로 바꿨으니 왕고와 이조는 역사가 완전히 단절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왕고와 이조는 왕조가 바뀌고 국호가 바뀌었을 뿐 영토와 백성은 동일하다. 이조는 곧 왕고의 후속국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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