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주지 않았다고 일가족 9명을 불태워 죽였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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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9.08. 오후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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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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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과 '경주 염라대왕' 이협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경주 내남면 150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위령비
ⓒ 박만순

1950년 1월 3일 경주 내남면 덕천리.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덕천리 마을로 향하는 청년 일행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한겨울 시골마을이 갑자기 개 짖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마을 초입에 있던 초가집 문의 창호지 사이로 눈망울이 나타났다. "웬 놈의 개들이 짖고 난리여"라며 김씨는 밖을 빼꼼히 내다봤다. "아이쿠." 지나가는 청년 일행을 본 김씨는 마치 저승사자를 만난 듯이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청년 일행은 다름 아닌 내남면 민보단원들이었다.

당시 경찰 하부조직이었던 민보단(民保團)의 청년들은 주성조의 집으로 향했다. "계시오?"라는 소리에 주성조가 방문을 열었다. 그들이 민보단원임을 안 주씨는 잔뜩 긴장했다. 제일 젊은 단원이 입을 열었다. "이 집 딸을 내게 주시오!" 청년은 앞뒤 말을 모두 자르고 뜬금없이 말했다. 한참을 멀뚱히 있던 주성조는 "무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아. 이 집 손녀딸, 주○숙이를, 내 달란 말이요. 내가 호강시켜 줄 것이요." 주변의 민보단원들은 히죽거렸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주성조(당시 62세)는 "미안하지만 내 손녀딸은 이미 (내남면) 안심리 박씨하고 언약을 했어요"라며 손자 뻘밖에 되지 않는 민보단원들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주씨에게 손녀딸을 달라고 했던 청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덕천리의 소문난 미녀인 '○숙'이를 쉽게 아내로 얻으리라 기대했던 꿈이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에잇! 가자"하며 민보단원들은 우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민보단원들의 행패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1월 4일 새벽 5시 10여 명의 민보단원들은 주성조 집 싸리문을 부셔버렸다. "빨갱이 새끼들, 전부 나와" 잠에서 덜 깬 주씨 가족들이 머뭇거리자 "빨갱이 새끼들을 잿간(헛간)에 전부 쳐넣어"라는 상급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민보단원들은 잿간 가에 쌓인 짚단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주씨 가족들이 곡소리를 내기도 전에 잿간 문을 잠갔다. 짚단은 순식간에 타버렸고, 잿간에 갇힌 주씨 가족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 아수라장에는 주성조(62)·이의용(57) 부부와 주말숙(6), 주희숙(2) 손녀도 있었다. 주씨 딸 주순희는 임산부였다. 태아까지 총 9명의 주씨 가족이 불에 타 죽었다. 이유는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였다. 민보단원들이 내남면 덕천리에서 소문난 미녀 주○숙이를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빨갱이 가족으로 뒤집어씌운 것이다.

민보단원들은 여성 6명이 포함된 주씨 가족을 불에 태워 죽인 후 다시 한번 강도짓을 했다. 주씨 집 본체 7칸을 해체, 목재를 탈취해 민보단 부단장 이한우의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를 훔쳐간 것은 물론이다.
 
소 판 돈 뺏으려고 김씨·손씨 집안 멸족
 
 경주군 내남면 민보단 사무실 터
ⓒ 박만순

경주 민보단의 패악질은 대단했다. 주씨 일가 사건이 일어나기 약 5개월 전인 1949년 7월 31일. 이날 사촌지간인 김정도(32)와 김호(19)는 내남면 용장리 장날 우(牛)시장에 갔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팔기 위해서였다. 집안 재산목록 1호였지만 큰일을 치르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다. 소 값이 좋아 두 사람의 입이 귀에 걸렸다.

"어이 거기 두 사람, 이리 와 봐"라는 고함소리가 우시장에서 소를 팔고 집으로 향하던 김정도 형제의 발걸음을 묶어 세웠다. 김정도 형제를 불러 세운 것은 역시나 경주의 민보단원들이었다. 민보단원들은 다짜고짜 김정도 형제를 내남지서로 끌고 갔다. 사실은 내남지서가 아니라 내남면 민보단(단장 이협우) 사무실로 끌고 간 것인데, 당시 민보단 사무실이 내남지서와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보단 사무실에서의 취조는 잠시였다. "이 빨갱이 새끼들, 너네 패거리 있는 곳을 대"라며 시작한 취조는 이내 구타와 고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민보단원들은 초죽음이 된 김정도 형제를 내남면 틈수골로 끌고 가서 실낱같이 남아있던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 민보단원들은 김씨 형제가 소를 팔러 나왔다는 밀고를 받고 소 판 돈을 빼앗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다.
 
 민보단이 김정도-김호 형제를 학살한 틈수골. 표지판 앞에 선 이는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
ⓒ 박만순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 팔러 나간 김정도 형제가 감감무소식이자 집안 식구들이 나섰다. 김정도의 어머니 임석순(65)과 처 곽귀주(31), 김호 어머니 박순이(42)가 민보단 사무실로 향했다. 곽귀주는 장애인 딸 김순덕(6)를 업고 갔다. 임석순이 소리쳤다. "내 아들 내놔." 임석순에게는 김정도가 외동아들이니만치, 민보단이 호랑이보다 무섭다지만 겁날 게 없었다. 하지만 아들과 남편을 찾으러 간 이들 역시 틈수골에서 학살되었다.

다음날은 음력으로 칠월 칠석이었다. 민보단원들은 자신들의 강도질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김씨 가족들을 전부 없애기로 했다. 민보단원 10여 명과 내남지서 이홍렬 순경이 네 팀으로 나뉘어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 김씨 집안에 들이닥쳤다. 김진수·김예수·김지수·김인수 집에 들이닥쳐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총질을 했다.

순식간에 김씨 집안 16명이 학살 당했다. 후일 산사람(빨치산)을 잡으려 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이날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 10세 이하 어린이는 김순영·김순자(각각 2세)를 포함한 9명이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목숨을 건진 이는 부엌으로 피신한 김하원의 아들과 이복여동생, 김하근의 아들 김성헌·김경헌 형제였다. 이틀 사이에 김씨 집안 22명을 학살한 살인귀들은 1949년 8월 1일 같은 마을 손씨 집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손씨 집안 식구 8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민보단이 김씨 집안에 이어 손씨 집안의 씨를 말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일은 1년 전인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년 전 외지에서 이사 온 박세현이 손씨가 추수한 벼 다섯 가마를 절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이장 김하근과 주민들이 분실당한 벼를 찾아 나서던 중 박세현 집에서 장물이 나왔다.

이장과 주민들이 박세현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박세현의 동생 박도환이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 가입했다. 이후 박세현·박도환 형제는 명계리 이장 김하근과 손씨 집안을 해코지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이후 김정도·김호 형제 사건이 터졌고, 민보단은 후환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김씨·손씨 집안 30명을 학살했다. 도대체 민보단이 어떠한 조직이기에 이런 불법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일까?
 
경주의 염라대왕 이협우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출처: 전갑생)
민보단은 1948년 6월 만들어진 경찰 보조 조직으로 '향보단(鄕保團)'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만들어진 향보단은 주민들에 민폐가 심했는데, 후신인 민보단도 마찬가지였다. 민보단은 전국적 조직이었고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내남면에도 조직돼 있었으며 이협우가 그 책임을 맡았다.
이협우는 1921년에 경주군 내남면 망성리에서 태어나 대구농림고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농업기수를 했다. 해방 이후에는 내남면 대동청년단장과 민보단장 및 대한청년단장을 맡았다.

1946년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경주에도 10월 항쟁의 여파가 거셌는데, 좌·우익간 대결과 투쟁이 빈번했고 일부 사람들은 '산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내남면 민보단은 총기로 무장을 했고, 좌익과 산사람을 잡아들이는 첨병 역할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현행법을 위반한 사람들을 체포해 재판에 넘겨 법의 시시비비를 가리게 했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이협우로 대표되는 내남면 민보단은 사적인 감정에 따라 광범위하게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위의 두 사례를 포함, 이협우의 민보단은 한국전쟁 전후로 민간인 약 200명을 불법적으로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대다수는 민보단이 주민들의 재산을 갈취하거나 여성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벌인 학살극이었다. 그러다 보니 60세 이상의 노인과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피해자의 38%를 차지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이협우의 민보단은 내남면 노곡리 최현호(74) 집안의 과부를 뺏기 위해 1950년 7월 22일 최씨 일가 22명을 학살했다. 또 그해 8월 11일에는 권경술(70) 집안 45명을 민보단에 비협조적이라며 학살했다. 1960년 4.19 혁명 후에 피해신고서가 제출된 사망자만 169명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전쟁기에 경주시는 '이협우 왕국'으로 소문났고, 주민들은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국회의원 모의투표 강행한 후보자
 
 2018년 5월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 MBC

 
내남면 민보단 단장 이협우는 후일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10년(1950~1960) 동안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협우는 대한청년당 소속으로 출마해 16%인 782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경주 을구에는 총 16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는데, 이협우는 을구에서도 면세가 컸던 내남면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그렇다면 내남면 주민들은 민보단에 그렇게 당하고도 왜 이협우를 선택했을까? 그 비밀 열쇠는 '공포'였다. 1960년에 경주유족회장을 지낸 김하종(88,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4동)은 "당시에는 (이협우가 무서워) 민보단 사무실이 있던 면소재지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않았어요. 국회의원 선거 때는 이협우가 당선되면 경주를 뜰 테니까 찍어주자 그랬어요"라고 증언한다.

당시 내남면 이조리에 살았던 최상춘(84,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은 특이한 증언을 했다. "이협우가 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연부락마다 모의투표를 했어요. 하천 변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는데, 자기 표가 적게 나오는 마을은 '절단'을 냈어요."

이협우는 해방 직후 내남면에서 대동청년단·민보단·대한청년단 단장을 거치며 반공투사로서의 업적(?)을 쌓아나갔다. 절대 다수가 불법적인 학살사건이었지만, 그 결과 주민들은 이협우와 민보단을 두려워하며 공포정치에 떨게 됐다. 
 
해병대 장교들이 법원 앞에서 데모한 사연

1957년 봄 경주지방법원 앞에서는 특이한 데모가 열렸다. 해병대 장교들이 '이협우를 구속하라', '유칠문의 재산을 반환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이협우는 당시 자유당 소속의 국회의원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집권 여당 국회의원을 구속하라는 사상 초유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시위에 참여한 해병대 장교들은 얼마 안 있어 모두 강제 예편되었다. 이런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957년 2월 해병대에 근무하던 유칠문은 이협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남면 망성리 출신으로 1949년 3월 8일 두 형과 가족을 민보단 손에 잃었다. 유칠문의 형 유칠우·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는 밀고를 받은 민보단은 밤에 유씨 집을 불태워 일가족을 모두 죽였다. 동생 유칠문은 당시 친구 집에 머물고 있어 화를 면했지만, 형들이 죽은 이후로는 객지를 전전했다. 토지 2500평과 대지 159평도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 빼앗겨 버렸다.

이후 해병대에 들어간 유칠문은 휴가를 한번도 쓰지 않았다. 고향에는 일가족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이협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씨가 휴가를 쓰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해병대 장교들이 그를 불러 물었고, 유씨는 이실직고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해병대 장교들은 분개했고, 이들의 응원에 힘입은 유칠문은 토지반환소송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재판부 판결이 다가오자 해병대 장교들은 경주지방법원에서 시위를 감행했다. 하지만 이협우가 어떤 자인가? 그는 국방부장관을 만나 군인들의 '정치개입'을 성토했고, 그 결과 해병대 장교들은 강제예편 당했다. 또 형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유칠문은 1957년 6월경 소를 취하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2016), 김하종 증언)

하지만 유칠문이 제기한 소송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았다. 3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경주유족회는 이협우를 '살인 및 방화혐의'로 고소한다. 이 재판 와중에 이협우는 스리슬쩍 유칠문에게 토지를 돌려주었다.

유칠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대는 '동토의 왕국시대'였다. 가해자는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해 두 다리 뻗고 자고, 피해자는 10년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이협우는 경주유족들에 의해 살인·방화·강도 혐의로 고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혁명재판소는 그에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지서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돌아서 가야 했던 김하종, 차라리 이협우를 찍어 줘서 경주에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내남면 주민들, 이협우와 민보단에게 가족을 잃었으면서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누가 알았을까?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장
ⓒ 경주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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