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16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뤄부포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첫 번째 핵폭탄 실제 크기 모형. 뒤에 있는 사진은 핵실험 성공 후 피어오른 버섯구름.
1964년 10월 16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뤄부포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첫 번째 핵폭탄 실제 크기 모형. 뒤에 있는 사진은 핵실험 성공 후 피어오른 버섯구름.

5월 7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갖는 박근혜 대통령은 1988년 대만의 핵 개발 노력 좌절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박 대통령 방미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한·미 원자력협정.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원자력협정 개정이 논의될 예정이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불투명하다. 한·미 양측은 정상회담 전 “내년 3월로 끝나는 협정시한을 2년 연장한다”는 식으로 갈등을 미봉한 상태다.

대만은 중국의 핵무기 보유에 맞서 비밀리에 자체 핵무장을 추진했으나 미국 CIA(중앙정보국)에 의해 사실상 좌절됐다. 1988년 CIA에 포섭된 장셴이(張憲義) 대만 국방부 산하 핵연구소 부소장(대령급)이 핵 개발 자료를 들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장셴이는 미 의회 비밀증언을 통해 극비리에 핵 개발을 추진 중이던 대만 당국의 노력에 치명타를 날렸다. 우연인지 모르나 장셴이의 미국 망명 직후, 장징궈(蔣經國) 대만 총통은 피를 토하고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대만이 본격 핵 개발에 나선 것은 1964년 중국이 세계 다섯 번째로 핵 클럽에 가입하며 양안(兩岸) 간 군사적 균형이 무너진 직후다.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탄·수소탄·인공위성)’ 계획에 따라 1964년 10월 16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성도(省都) 우루무치 동남쪽의 뤄부포(羅布泊)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 대만 총통은 중국의 핵실험 성공 1년 전인 1963년, 미국의 U-2 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통해 중국의 핵무장이 임박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대만은 1954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었지만, 생사존망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장제스는 국공내전 때인 1946년부터 핵폭탄의 필요를 절감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미국의 핵폭탄 두 발에 항복을 선언한 직후다. 홍콩의 봉황TV 등에 따르면, 장제스는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미국으로 세 명의 물리학자를 파견해 핵기술을 연구케 했다. 하지만 1949년 마오쩌둥에게 패해 대만으로 도주하면서 핵폭탄 개발은 중지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라이벌인 마오쩌둥이 먼저 핵 개발에 성공하면서 장제스를 초조하게 만든 것.

이에 장제스는 “5년 내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장 계획을 구체화한다. 핵 개발 프로젝트명은 ‘신주계획(新竹計劃)’. 대만 서부 신주에 있는 대만 칭화대학 내에 원자로를 설치하고 핵 개발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핵 개발 모델은 이스라엘의 ‘디모나계획’이었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평가받는 이스라엘은 1950년대 말 ‘디모나계획’에 따라 프랑스 핵기술을 베껴서 핵무기 보유에 성공했다.

‘이스라엘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도 고문으로 영입했다. 장제스는 타이중(臺中) 일월담(日月潭)에 있는 별장에서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3일간 면담하며 “이스라엘과 대만은 동병상련의 국제고아”란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핵무장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며 버그만 박사에게 극진한 대우를 했다. 또 버그만 박사의 부인은 영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로부터 국보급 장신구 등을 선물받았다고 한다.

장제스는 “경제적 부담과 국토 협소” 등을 이유로 일부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장제스는 신주계획을 ‘타오위안계획(桃園計劃)’이란 극비 계획으로 전환시킨다. 타이베이 외곽 타오위안(桃園)현 룽탄(龍潭)에 있는 국방부 직속의 석문(石門)과학연구소를 1969년 중산과학연구원으로 확대개편해 핵무기 개발을 극비리에 주관케 했다. 중산과학연구원은 대만 국방부에 직속돼 역대 원장은 중장(별 셋) 이상 고위 군장성이 도맡았고, 소속 연구원은 현역 군인 신분이다. ‘국방자주, 과기건군’을 슬로건으로 전투기와 미사일을 비롯 전자전, 화학전에 대비한 무기개발을 표방하고 있었다. ‘중산’이란 연구원 이름은 국부 쑨원(孫文)의 호(중산)에서 따왔다.

핵 개발은 중산과학연구원에 극비리에 부여된 임무 중 하나로, 비밀리에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239’를 추출하려고 했다. ‘재처리 플루토늄’으로도 불리는 플루토늄 239는 연쇄 폭발반응이 뛰어나 연료봉을 재처리하면 이곳에서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물질을 얻을 수 있다. 또 미국의 눈을 피해 남아공에서 우라늄을 들여왔고, 캐나다에서 핵반응기 등의 원료와 설비를 반입했다. 대만 동남부 핑동(屛東)현에는 지우펑(九鹏)기지란 지하 핵실험장까지 마련했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한 장남 장징궈도 자체 핵무장을 고수했다. 장징궈는 장제스의 사망 전부터 국방부장, 행정원장(총리에 해당)으로 후계수업을 받아왔다. 1979년 덩샤오핑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미·중수교로 인해 대만의 상황은 더 절박해졌다. 1979년 미·중수교 때 덩샤오핑이 고수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인 미국은 비록 군사적 보호를 공언했지만, 동맹국인 대만과 전격 단교했다.

“한(漢)나라를 찬탈한 도적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은 장제스·장징궈 부자가 고수한 원칙이었다. ‘한적불양립’은 삼국지 제갈량의 ‘후출사표’에서 따온 말이다. 촉한의 제갈량은 유비의 촉한을 정통, 조조의 위나라를 도적으로 규정했는데, 장씨 부자 역시 중화민국(대만)을 정통, 마오쩌둥의 중공을 나라를 훔친 도적으로 지목한 것.

하오보춘(郝柏村) 등 대만 군부 강경파는 장징궈의 ‘한적불양립’ 노선을 뒷받침했다. 장제스가 초대 교장을 지낸 황푸(黃埔)군관학교(12기) 출신인 하오보춘은 금문도(金門島) 방위사령관, 참모총장, 국방부장, 행정원장을 지낸 강경파다. 하오보춘은 장제스의 직계로 대만 총통부 시위장(경호실장에 해당)을 지냈고, 1982년부터 1988년까지 참모총장 겸 중산과학연구원장으로 대만의 핵 개발을 지휘했다.

당시 장셴이는 하오보춘이 원장으로 있는 중산과학연구원 산하 핵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45년생으로 대만 중부 타이중에서 중·고교를 나온 장셴이는 육군이공학원(현 중정이공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중산과학연구원 초기 설립 때부터 참가했다. 또 1969년에는 국비로 미국 테네시대학에 유학해 원자력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6년 귀국해 현역 상교(대령급) 계급으로 중산과학연구원에서 극비 핵 개발에 관여해 왔다.

하지만 1988년 1월 9일 장셴이는 돌연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주했다. 도주 다음 날 장셴이가 달아난 사실을 알아챈 대만 국방부는 그를 ‘간첩’으로 지목하고 ‘추포령’을 발동했다. 장셴이는 1월 12일 미 의회 비밀증언에 나서, 장징궈 정권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폭로했다. 이후 1월 1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중산과학연구원에 대한 특별 핵사찰에 돌입했고, “핵개발과 관련한 모든 설비를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셴이의 폭로 다음 날인 1월 13일 장징궈 총통마저 급서하자 대만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장징궈의 급서로 ‘장가천하(蔣家天下)’로 불리던 대만의 장씨 세습정권도 무너졌다. 장제스의 장남인 장징궈는 장제스가 과도총통으로 내세운 옌자간(嚴家淦) 총통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아 세습에 성공했다. “장징궈 역시 부친의 전례를 따라 (내연녀 장야뤄가 낳은) 아들 장샤오옌(蔣孝嚴·국민당 부주석)에게 이양하려 했다”고 얘기된다. 삼대 세습을 위한 후계체제를 다지기도 전에 무너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총통 유고 사태 때 데이비드 딘 미국재대협회(AIT·미국대사관에 해당) 회장은 장셴이가 제공한 문건을 하오보춘에게 들이대며 핵무장 계획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고 한다. 미국 첩보위성이 촬영한 지우펑 지하기지의 소형 핵실험 위성사진도 함께 제시됐다. “일주일 내에 핵 개발 계획을 중지하고,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으면 1954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을 철회하겠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장제스·장징궈 정권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천도한 후 미국의 군사지원에 기대 왔다. 1958년부터 1979년까지 21년간 이어진 중국과의 금문도 포격전 때도 미국의 지원으로 보급선을 유지했다. 하오보춘 전 행정원장은 1999년 출판한 ‘8년 참모총장 일기’란 자서전에서 “담판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결국 장징궈의 후임 총통인 리덩후이(李登輝)는 미국의 강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장셴이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CIA에 포섭됐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문건도 장셴이 케이스를 직접 다룬 것은 없다. 여권도 없이 미국으로 출국할 수 있었던 것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일각에서는 “CIA가 장셴이의 고향인 타이중에 있는 칭촨강(淸泉岗)공항에 특별기를 마련해 장셴이를 탈출시켰다”는 얘기도 나온다. 칭촨강공항은 베트남전 때 미 공군 B-52 폭격기가 중간보급을 받던 미 공군기지였다.

중국중앙방송(CCTV)은 대만역사전문가를 인용해 “장셴이는 1968년경 미국에 매수당했다”고 보도했다. 1997년 뉴욕타임스는 “장셴이 망명은 CIA가 추진한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라고 소개하며, “CIA는 1960년대 당시 사관생도였던 장셴이를 포섭해 미국의 특수요원으로 만들었고, 장셴이는 1970년대부터 핵개발 관련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결론적으로 장셴이는 20~30년간 CIA 첩자로 암약해온 셈이다. 하오보춘은 이와관련 자서전에서 “우리는 일찍부터 CIA가 중산과학연구원에 잠입해있다고 생각했다”며 “사실 장셴이 한 명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CIA 출신으로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 역시 장셴이 사건과 연루돼 있다. 제임스 릴리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태어나 중국·대만·홍콩·한국 등 CIA의 동아시아 공작에 종사했고, 1980년대 초 미국재대협회 회장이자 CIA 대만 지부장으로 대만 공작을 총지휘해 왔다. CIA에 대한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팀 와이너는 ‘잿더미의 유산’이란 저서에서 제임스 릴리의 말을 인용해 “유망한 친구를 선발하고 제대로 된 담당요원을 붙인다. 그리고 이념적인 토대에서 그를 포섭하고 돈도 제공한다”고 썼다. 팀 와이너에 따르면, 제임스 릴리는 장셴이의 정체를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장셴이는 CIA의 보호하에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88년 미국 망명 직후 대만 언론에 “장셴이가 버지니아에 있다”는 보도가 나온 후에는 야반도주했다. 지금은 아이다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당 특무기관인 ‘군통’의 후신인 대만 국방부 정보국이 손을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대만 국방부 정보국은 1984년 죽련방(竹聯幇)을 동원해 장징궈를 비판한 재미 대만기자 류이량(劉宜良)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한 뒤 요주의 대상에 올랐었다. 대륙 출신 외성인(外省人)들이 결성한 대만 최대 폭력조직 죽련방은 국민당 정적암살 등 정치테러에 개입해 왔다.

장셴이는 미국 망명 10년 만인 1998년, 대만의 친국민당 성향의 신문 연합보(聯合報)에 편지를 보냈다. 장징궈 총통이 급서한 지 10주기 되는 전날이었다. 장은 서신에서 “우리는 이미 장공(蔣公·장제스)과 장총통(장징궈)이 부여한 임무를 완성했다. 우리는 능력이 있다. 단지 핵무기를 제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장셴이의 서신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다.

대만 독립을 표방한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의 집권 시절에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추진 중이다”란 의혹이 입법원(국회에 해당)에서 제기됐다. 당시 홍콩의 아주주간은 “대만이 2004년부터 인도의 지원을 받아 핵을 개발 중이다”는 보도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천수이볜은 “대만에는 핵폭탄이 없고, 개발할 의사도 없다”고 했지만 대만의 핵능력에 대한 정확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장셴이의 서신대로라면 대만은 적어도 자체적인 핵무기 제조기술은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장징궈의 영문통역비서 출신인 마잉주(馬英九) 현 총통은 “대만은 핵 포기를 선언했지만, 핵무기 제조능력이 있다”고 밝혔다. 국민당의 차기 총통 후보로 거명되는 하오롱빈(郝龍斌) 타이베이 시장이 하오보춘의 장남이란 점도 관심거리다. 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등 역대 타이베이 시장은 모두 총통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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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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