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의리

이종탁 논설위원

“남자는 의리다.” 어린 시절 자주 듣던 말이다. 학교에선 지(智), 덕(德), 체(體)라 가르쳐도 학교 문밖을 나서면 의리를 제일로 쳤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나이”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난 끝내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남자에겐 더 없는 찬사였다. 그런 사내는 언제나 멋이 있고 어디를 가도 환영받았다. 하긴 자기 이익보다 남의 처지를 먼저 헤아려 챙겨주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꼬장꼬장한 원칙파 주위엔 사람이 없어도 화끈한 의리파 주위에는 사람이 몰리는 게 당연했다.

[경향의 눈]노무현의 의리

언제부터인가 의리라고 하면 우리는 건달 세계부터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조폭영화의 여파일 것이다. 하지만 의리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를 막론하고 꼭 지녀야 할 덕목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의리(義理)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 또는 남과 사귈 때 지켜야 할 도리라 쓰여 있다. 인간관계의 기본이 의리인 셈이다.

올바른 도리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각자 처한 지위(地位)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임금의 도리와 신하의 도리, 아버지의 도리와 자식의 도리, 회사 사장의 도리와 종업원의 도리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노무현가(家) 사람들이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자. 스토리를 엮어가는 핵심 단어가 의리와 배신이다.

강금원 회장에 대한 의리 과시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소환을 코앞에 둔 위기의 순간에도 구속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 대해 깊은 의리를 만천하에 과시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았다. 그에 대해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다.”

반면 또다른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는다. 박 회장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만큼 배신자로 보는 것이다. 600만달러라는 거액이 오간 사이지만 검찰의 압박수사를 받으면서 관계는 파탄나고 말았다.

드라마 전개 양상은 노 전 대통령의 죽마고우라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입에 달려 있다. 그는 권양숙 여사가 돈 받은 내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노무현가와의 의리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결말이 빨리 올 수도, 더디게 올 수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강 회장은 이 시대 보기 드문 의리의 사나이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변함없이 노무현 곁을 지키고, 뭉칫돈을 뿌리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노무현 가문의 후예로서 의리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하는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강 회장의 의리에 감복해 “바보 강금원”이라는 말을 썼다. 노무현에 버금가는 애정과 존경심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가 노무현가에 보여준 의리만큼 창신섬유 종업원에 대해서도 의리를 다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검찰 주장대로 그가 회삿돈 265억원을 횡령한 게 사실로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는 범죄행위를 의리로 포장한 위선자일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강 회장에 대해 애틋한 사적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일개 기업인과 전직 대통령이 지켜야 할 의리는 같을 수도, 같아서도 안된다. 기업인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껏 베풀 수 있지만 국민과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은 다르다. 기업인의 의리는 사적이지만 대통령의 의리는 공적이다.

공적 의리와 혼동한 건 아닌지

현 시점에서 노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의리를 지키려면 진실을 모두 털어놓고 참회하는 길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부인 권 여사가 돈 받은 사실을 얼마전까지 까맣게 몰랐다고 치자. 그래서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겠다면 권 여사가 그 돈을 어떻게 받아 어디에 썼고, 최근 자금수수 사실을 알게 된 뒤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도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그런 뒤에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라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노 전 대통령 부부가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며 “어디 한 번 증거 찾아 봐라. 아마 쉽지 않을걸?” 하며 버티는 꼴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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