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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사 - 조약이 맺은 역사의 고빗길

전연의 맹약

북송(北宋), 북조(北朝)를 인정하다

“윤9월 기미(己未)일, 남쪽을 정벌하였다. (......) 갑자(甲子)일에 푸른 소와 흰 말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병인(丙寅)일에 군대가 송나라의 군대를 당흥현에서 크게 깨트렸다. 정묘(丁卯)일에 소달름(蕭撻凜)이 송나라 군대를 수성에서 크게 깨트렸고, 경오(庚午)일에 망도에 진을 쳤다. (......) 11월, 계해(癸亥)일에 마군도지휘사 야율과리가 명주에서 송나라 군대를 깨트혔다. 갑자(甲子)일에 동경유수 소배압(蕭排押)이 송나라의 전봉길, 곽수영, 상현, 유작 등을 사로잡아 바쳤다. 정묘(丁卯)일에 남원대왕 야율선보가 보고하기를 송나라에서 (항복한 장수)왕계충에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화친을 청했다 하였다. 이에 왕계충에게 조서를 내려 화친을 협의토록 하였다. 경오(庚午)일에 덕청군을 공격해 깨트렸다. 임신(壬申)일에 전연(澶淵)에 진을 쳤다. 소달름이 복병의 쇠뇌(활에 쇠로 된 발사장치가 있어 살상력이 강한 무기)에 맞아 죽었다. 을해(乙亥)일에 통리군을 공격해 깨트렸다. 정축(丁丑)일에 송나라가 숭위부사 조이용(曹利用)을 보내 화친을 청하니, 곧 비룡사 한기(韓杞)를 보내 맞이했다.....”

원(元)왕조 때 편찬된 [요사(遼史)]의 일부로, 유명한 “전연의 맹약”이 이루어지기까지 성종(야율융서) 치하의 요나라가 진종(조항) 치하의 북송을 약 3개월 동안 침공한 “전연의 전쟁” 부분의 묘사다.

연운 16주의 한(恨)

11세기의 동아시아. 요, 북송, 서하가 대립하였으며, 요와 북송 사이의 노란색 부분이 연운 16주이다.

그런데 역시 원왕조에서 펴낸 [송사(宋史)]는 같은 내용을 자못 다른 분위기로 전하고 있다.

“경덕(景德) 원년, 융서가 그의 어머니 소씨(蕭氏), 통군 소달름 등과 함께 대군을 이끌어 침략해왔다. 그들은 전연을 포위하려 하였으나, 달름이 쇠뇌에 맞아 죽었다. 황제(진종)께서 친히 그들을 정벌하고자 전연에 이르러 북성문(北城門)으로 행차하셨다. 그러자 저들에게 항복했던 장수 왕계충이 융서에게 화친이 이롭다고 설득하고, 비밀히 표문을 올려 그 사실 조정에 알려왔다. 이에 조서를 내려 계충을 어루만지고 조이용을 융서의 병영에 보내니. 융서가 한기에게 이용과 함께 가서 맹약을 요청하라 하였다.”

[요사]에서는 전연의 전쟁이 요나라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지다가 송나라의 간청을 받아들여 화평을 교섭하게 된 것처럼 나와 있으나. [송사]는 요나라가 공격했으나 송나라에게 도리어 밀리자 화평을 구걸한 듯이 적혀 있다. 둘 다 원나라에서 펴낸 사서이지만, 요와 송의 왕실에 남아 있는 사료를 갖고 편찬했으므로 이렇게 다른 뉘앙스가 연출된 것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그리고 애초에 요와 송은 왜 전쟁을 했던 것일까? 그 실마리는 그로부터 약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36년, 석경당(石敬瑭, 892~942)은 오대(五代)의 하나인 후당(後唐)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며, 거란(요)의 지원이 없었던들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석경당은 그 대가로 이듬해에 “연운(燕雲) 16주”를 떼어 거란에 바치니, 지금의 북경 일대인 유주(幽州)를 비롯하여 계주, 영주, 막주, 탁주, 단주, 순주, 규주, 유주(儒州), 신주, 무주, 운주, 응주, 삭주, 환주, 울주 등 지금의 허베이성과 산시성 일대의 열여섯 고을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만리장성 남쪽인 이 지역이 요나라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북방민족에게 막대한 재원(연운 16주에서의 세입이 요나라 영토 나머지의 세입보다 훨씬 많았다)과 함께 중원을 공략하는 데 매우 유리한 거점을 넘겨주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석경당은 명분 차원에서 중국의 유학자들이 기절하고도 남을 일도 저질렀다. 요나라 황제로부터 ‘아들 황제(兒皇帝)’에 “책봉”받았던 것이다. 당당한 중국의 황제가 북방의 오랑캐에게 책봉을 받고 신하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나, 천하에 황제는 단 하나뿐이라는 이념이 엉망이 된 것이나, 중국인들로서는 연운 16주 할양으로 실리를 크게 잃었을 뿐 아니라 명분에서도 그 못지 않은 좌절감을 맛본 것이었다.

연운 16주. 지금의 허베이성과 산시성 일대 열여섯 고을로, 이곳을 요나라에 할양함으로써 막대한 재원과 함께 중원 공략의 거점을 넘겨준 셈이 되었다.

그런 좌절과 분노는 갓 태어난 왕조를 온통 사로잡았고,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설욕하자는 쪽과 그것을 막으려는 쪽 사이에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석경당이 병사하자, 황제위를 이어받은 조카 석중귀(石重貴, 914~964)는 요에 ‘불손한’ 태도를 취한 끝에 결국 전쟁을 초래했다. 그 전쟁은 후진의 멸망을 가져왔으나, ‘오랑캐들에게 설욕하자!’는 신념은 뒤를 이은 후한(後漢), 그리고 후주(後周)에게 계승되었다.

특히 후주의 세종 시영(柴榮, 921~959)은 959년에 요나라를 공격하여 연운 16주 중 남쪽의 영주, 막주를 빼앗는 쾌거를 이루었다. 세종의 오른팔 격인 장수였다가, 세종이 젊은 나이로 병사한 뒤 쿠데타를 일으켜 송왕조를 세운(960년) 조광윤(趙匡胤, 927~976)은 세종의 못다 한 꿈을 반드시 이루겠노라 다짐했다. 이전의 오대 황실이 돌궐족 등 북방민족 출신이 많았던 데 비해 그는 한족이었으므로 더욱 그런 의식이 짙었을 것이다. 그래서 즉위 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요나라를 공격한 후 계속해서 북벌을 추진, 조각조각 갈라져 있던 십국(十國)을 잇달아 멸망시키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추진하는 한편 ‘연운 16주를 되찾고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목표 달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남과 북의 대결

11세기 송나라의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묘사된 투석기. 기초적인 화약무기의 투발에도 사용되었다. 송나라는 많은 군사기술에서 주변 국가들보다 앞서 있었지만, 정작 군사력은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달성하기에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요나라는 북방민족 특유의 강력한 기병대를 운용한 반면, 송나라는 전통적인 군마의 산지인 서부 지역이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의 차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구는 많아도 그럴듯한 기병대를 내세울 수 없었다. 게다가 오대 왕조가 창업과 멸망을 빠르게 반복한 까닭이 지방 방위를 책임진 절도사가 군벌화되며 창을 거꾸로 잡아온 데 있음을 고려, 절도사의 권한을 대부분 없애는 중앙집권제와 상급에서 하급까지 장교직을 문관으로 채우는 문치주의를 실시한 결과 정치 안정은 되었으나 북송의 군사력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말았다. 또한 북송은 백성의 대부분을 생업에 종사시키고 병력은 모병제로 충당했는데, 죄수나 불량배 등이 주로 병역에 지원하고 그나마 규정보다 실제 처우가 열악한 경우가 많아 병사들의 사기가 늘 바닥이었다. 그래서 한, 당, 명 등 역대 중국 통일왕조들과 비교할 때 최고 수준의 문화와 경제력을 달성했지만, 군사력은 상당히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북송 왕조였다.

그래서 태조 조광윤의 뜻을 이어받아 제위에 오른 그의 동생 조광의(趙光義), 송태종은 979년에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마침내 천하통일을 성취하고는 전력으로 요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기구관 등에서 참패하고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하다가 백성의 수레를 훔쳐 타고 간신히 달아나는 치욕을 겪고 말았다. 그 뒤로 공수의 입장은 역전되어, 요나라가 거의 매년 병력을 내어 남침하는 한편 북송은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요가 북송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병대 중심의 요나라 군대는 돌파력에서는 북송을 앞섰지만 수가 적었고, 경제력도 떨어졌다. 따라서 적진을 깊숙이 돌파해 들어가고 나면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앞서 후진을 멸망시켰을 때도 화북을 오래 점령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게다가 연운 16주는 본래 중국계인데다 과도한 세금에 대한 불만도 많아서 송나라의 회유에 끌려 요나라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잦았다. 요나라가 남침을 거듭했던 데는 이를 진압하려는 불가피한 사정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요도 북송도 혼자 힘으로 상대를 완전히 제압할 자신이 없자, 동북아에서는 숨가쁜 외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요는 고려-서하와 연대하여 북송을 멸망시키려 했고, 반대로 북송은 고려, 여진, 나아가 일본과 손잡고 토번(티베트)을 부추겨 요를 밀어붙이려 했다.

전무후무한 침략

거란의 기마전사. 요나라는 북방민족 특유의 강력한 기병대를 운용해 북송을 압박했다.

그런데 “전연의 전쟁”이 일어날 무렵, 힘의 균형은 북송 쪽에 상당히 불리하게 기울어졌다. 당시 고려는 명백히 '친송반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송과는 오대 시절부터 친근했던 반면, 요는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993년에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蕭遜寧)이 고려의 서희(徐熙, 942~998)와 회담하여 강동 6주를 분할해 주되, 송과의 교류를 끊고 요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고려는 이후에도 송과 비공식적 관계를 유지했고 요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몇 차례나 더 침공이 이루어졌지만, 이로써 당장 고려가 송과 손을 잡고 요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없어진 것이었다. 또한 이에 앞서 서하의 이계천(李繼迁)이 983년에 북송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986년에 요나라에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하왕(夏王)에 책봉되었으며, 여진 역시 요나라를 섬기는 입장을 나타냄으로써, 서기 1000년 무렵 북송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당시 요황제 성종(聖宗)은 즉위할 때 나이가 어렸기에 모후인 소작(蕭綽, 953~1009), 즉 승천태후 소씨가 섭정을 맡았다가 그 체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중국사에서 손꼽는 여걸 중 하나였던 그녀는 979년에 송태종의 20만 대군을 격파한 주역이었고, 내정과 외치에 모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한동안 정체되었던 요나라의 국세를 다시 떨치게 만든 지도자였다. 이제 그런 사람이 대대적인 ‘남방 정벌’에 나서고 있었다. 마침내 1004년, 그녀는 20만의 병력을 일으켜 소와 말을 잡아 제사를 지낸 다음 남쪽으로 진군했다. 쉰 살이 된 태후가 스스로 갑주를 두른 채 말에 오르고, 그녀의 좌우에는 이제는 청년으로 성장한 야율융서(성종)와 명장 소달름이 말을 몰았다. 몇 년 뒤 요의 제2차(1010년), 그리고 3차 고려 침공(1018년)에 나서고 3차 때는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참패하게 될 소배압도 장수들 가운데 있었다.

요의 대군은 순조롭게 송나라를 공략하는 듯했으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고질적인 보급 문제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약 3개월 만에 전연(澶淵, 오늘날의 허난성 푸양현 근방)까지 눈앞에 두게 되었는데, 이곳을 점령하면 송의 수도 개봉(開封)까지는 하룻길이었으므로 전쟁의 승패가 곧 판가름 날 상황이었다. 북송도 잔뜩 긴장하여 황제 진종(眞宗)이 친히 전연으로 나와 요의 대군과 대치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결연한 모습은 자칫 보지 못할 뻔했다. 전연에서 적과 맞서느냐, 개봉을 포기하고 천도하느냐를 두고 송의 조정이 한바탕 시끄러웠었기 때문이다. 부재상 왕흠약(王欽若)은 강남의 금릉으로, 진요수(陳堯叟)는 사천의 성도로 천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 재상 구준(寇准)이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천도를 주장하는 자들을 잡아죽여, 그들의 피를 전고(戰鼓)에 바르고 북을 치며 출정해야 합니다!”

왕흠약 등이 어안이 벙벙해 있자, 진종은 ‘저들의 기세가 저리 대단한데, 승산이 있겠는가’라고 구준에게 물었다. 구준은 ‘폐하가 친히 전장에 납시어 병사들을 격려하신다면 우리 군대가 용기백배하여 반드시 적들을 무찌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요새에 농성하여 굳게 지키면 저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어찌 천도를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 군민을 흩어지게 하고 우리 강산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구준은 감정에 치우친 강경론자가 아니었다. 송군은 수는 많지만 사기가 부족해서 위력이 떨어진다는 점, 반면 요군은 정예병이지만 보급이 힘들어 적지에서 오래 작전할 수 없다는 점을 꿰뚫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황제가 수도를 버린다면, 송나라 군대와 백성은 혼비백산하여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이다. 11년 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때 공포에 사로잡힌 고려 왕실이 거란군에게 땅을 베어 주고 항복하려는 것을 서희가 나서서 무마하고 거뜬히 침략을 막아냈듯, 전연의 전쟁에서도 구준이 냉정한 현실 판단에 근거한 정면돌파론을 내놓아 국난을 수습한 것이었다.

사실 요나라 쪽에서도 속이 편치 않았다. 팽팽한 균형을 깨고 송을 압도하고자 회심의 승부수를 띄웠으나, 생각보다 전황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와 [송사]가 어느 쪽이 먼저 시작했는지를 두고 기록이 엇갈리지만, 요에 항복한 장수 왕계충을 통해 화평 교섭을 은밀히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화평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발생한다. 대원수 소달름이 순찰을 돌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숨진 것이다. 그는 명장인데다 정치적 비중도 큰 사람이어서, 승천태후는 닷새 동안 조회를 폐하며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송의 수도만을 바라보고 일점돌파(一点突破) 해왔으나 그 문턱인 전연이 쉽게 뚫릴 것 같지는 않고, 잘못하면 지방에서 증원된 송군에게 포위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제 요는 송과 맹약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천지신명에게 맹세하다

송의 진종. 암군은 아니었으나 유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송의 사절 조이용의 첫 번째 화평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송나라에서는 옛날 한나라가 흉노를 달래던 본을 받아 매년 일정한 세폐(歲幣: 중국 역대왕조가 북방의 유목국가에 일정액의 물자를 보내던 외교적 화친 정책)를 줌으로써 화평을 성취하려고 했다(진종은 연간 100만 냥 정도라도 좋다고 언질을 주었으나, 구준이 조이용을 조용히 불러 “30만이 넘는 날에는 내가 네 목을 베어 버릴 테다”라고 을렀다고 한다). 그러나 요나라 쪽에서 “후주의 세종이 빼앗아간 관남(영주, 막주) 땅을 내놓아라”고 요구하였으므로 강화가 성사될 수 없었다. 요나라에서는 연운 16주가 후진에게서 받은 요나라 땅인데 그 중 일부를 후주에서 빼앗았으니 마땅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송나라에서는 나머지 연운 16주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송태조 이래의 국시인데 하물며 땅을 더 떼어줄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조이용은 승천태후와 성종 앞에서 이보다 한 걸음 물러서는 논리를 내세웠다. ‘옛날 일은 우리는 모르는 일이고, 우리는 후주에게서 물려받은 강토를 지킬 뿐이다’는 것이었다. 땅을 떼어줄 수는 없지만, ‘옛날 일은 모르는 일’이니 연운 16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승천태후는 그것이 송나라의 큰 양보임을 알면서도 밀고 당기기를 하려고 ‘관남을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조이용을 돌려보낸 뒤 한 차례 패배시켰던 통리군을 다시 공격하여 송나라 조정을 압박했다.

송의 조이용과 이계창, 요의 한기와 요간지는 양 진영을 몇 차례 오가며 교섭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타결점에 이르렀다.

• 양쪽 모두 이 맹약을 신의와 성실을 다해 지킨다. (송은)풍요로운 땅이므로 상대의 군비를 도와주되,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으로 한다. 다만 북조(北朝)로 사신이 들어와 이를 전달하지 않고, 웅주(雄州)에 이르러 넘긴다.
• 경계지대의 주둔군과 일반인은 상호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도적이 상대방 지역으로 도망가는 경우에는 즉시 돌려보낸다.
• 상대 땅의 전답과 곡식을 서로 어지럽히지 않는다.
• 양 지역의 성과 해자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며 신설하지 못한다.
• 이 맹세의 내용 외에는 서로 요구하지 않으며, 앞으로 서로 협력하여 나라를 유구하게 보존한다. 이를 각자 천지신명에 맹세하며, 종묘사직에 고한다. 각자의 자손들도 이를 영구히 지켜야 한다. 이 맹세를 어기면 복을 누리지 못하리니,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평화의 가격, 그리고 참된 가치

[요사]에는 이 조항들 외에도 송 진종이 승천태후를 ‘숙모’로 부르기로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송사]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는 한편 “융서가 황제를 형으로 섬기기로 했다”는 말이 있다. 결국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이야기인데, 순전히 명분에 해당하는 이 조건을 양국이 각자 유리하게 써먹은 셈이다. 요나라는 ‘벼르고 별러 전쟁을 하고도 땅은 조금도 얻지 못했다’는 비난에 ‘저 교만하던 송나라 천자가 우리 태후를 숙모로 대접하기로 했다’는 점을 내세우는 한편, 송나라는 ‘후진의 석경당은 거란을 아버지로 섬겼는데, 우리는 저들을 동생으로 삼았다’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이 매년 요에게 보내는 세폐도 조약문에서 보듯 ‘풍요로운 땅에 사는 형이 아우에게 선심을 쓴다’는 식으로 호도되었다.

사실 그 정도의 세폐는 요나라에게는 꽤 의미가 있었지만, 송나라로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 비용의 백분의 일에 불과했다는 연구가 있다. ‘관남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관남의 연간 세입에 해당되는 금액을 주기로 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당시의 북송은 그 정도의 돈을 들여서 평화를 얻었다면 남는 장사로 생각해도 좋았다. 얼마 후 진종은 봉선(封禪: 중국의 제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일)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데, 세폐의 10배가 넘는 금액이 들었다고 한다.

불궁사의 석가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목탑으로 1056년, 연운 16주의 하나인 광주 땅에 요나라가 세웠다.

그러나 실리는 어찌되었든, 명분의 상처는 깊이 남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운 16주의 회복을 꿈꿔오지 않았던가? 형이든 동생이든 이제 요나라를 ‘북조’라 부르며 대등한 황제국가가 또 있음을 만천하에 인정했으니, “하늘 아래 임금은 단 한 사람뿐”이라는 오랜 유교 이념은 뭐가 되는가? 오대와는 다르게, 북송은 한족이 중심이 되고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선비들이 이끌어가는 나라였으니 그 상처를 계속 아프게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결국 북송이 전연의 맹약의 교훈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천도론을 막고 실리를 취함으로써 나라를 구한 셈이던 구준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자고 한 간신”이라는 비난에 못 이겨 얼마 뒤 사임해야 했다. 진종은 진종대로 땅에 떨어지고 만 자신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천자만이 할 수 있다는 봉선 행사를 실시하고 도교를 진흥하려 옥청소흥궁을 건립하는 등 애를 써야 했다.

그런 한편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한 수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든 군사력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다. 왕안석(王安石)이 세운 보갑법과 보마법이 그런 드문 노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곧 당쟁에 휘말려 좌절되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한 당쟁에. 병자호란 후의 조선에서도 허망한 북벌론이나 경직된 명분론에 목을 매고, 한결 살벌해진 당쟁으로 지새우는 모습을 보이거니와 당시의 송나라도 그랬던 것이다.

더 나쁜 것은, 큰코다쳐놓고도 실력을 쌓을 생각은 없이 내부 분열에만 골몰하는 송나라의 모습이 주변 나라들에게 한심하게 비쳤다는 사실이다. 서하는 황제국을 자처한 뒤 송나라를 침략하여 전연의 맹약에 흡사한 조약(경력의 화의)으로 매년 세폐를 받기로 했으며, 송나라에 계속 우호적이었던 토번과 고려도 점차 냉랭해져서 요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한편 여진은 요의 쇠퇴를 틈타 점점 세력을 불려나갔다.

여기서도 송나라가 전연의 맹약에서 얻은 결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요나라는 맹약 이후 한 차례 세폐의 증액을 요구하기는 했으되 다시는 송을 침략하지 않았고, 양국은 100년이 넘게 평화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을 씻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해 있던 송나라는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도 요나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당시 요와 송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는’ 관계였음에도 힘을 합쳐 신흥 강대국을 견제하지 않고, ‘천지신명에 맹세했던’ 맹약을 깨고 요나라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연운 16주의 짧은 탈환, 그리고 요에 이은 북송 스스로의 멸망이었다. 이후 강남에 세워진 남송은 약 100년 뒤, 원나라의 금나라 침공을 멀리서 보며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평화를 돈으로 사는 일은 때로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돈을 치르고 얻은 평화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발행일

발행일 : 2013. 04. 22.

출처

제공처 정보

고대부터 현대까지 64개의 조약으로 읽는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 그리고 진보의 역사.
‘지뢰는 과연 쓸모 있는 무기일까?’, ‘난징 조약은 불평등조약인가?’와 같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세계사의 이면을 파고들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힌다. 강화도 조약과 같이 우리 역사 속 조약부터 마스트리히트 조약처럼 생소한 조약, 고대의 히타이트-이집트 조약에서부터 현대에 체결된 리우환경협약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형성한 조약을 알아본다.

  • 함규진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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