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등지에는 낙랑과 대방 2군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곳이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에서는 대개 관심을 갖지 않는것 같다.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낙랑을 지배하던 한족들의 우수한 중원문화를 접한 우리 조상들이 일찍부터 이를 보고 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뒷날 삼국은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통해 제각기 발전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때 중국의 장례문화도 같이 들여오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낙랑의 중국식 장례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낙랑 등의 고분들은 평안남도 대동군·안악군·중화군 등과 황해도 재령군·봉산군·신천군·안악군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고분들은 크게 나무덧널무덤[木槨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나무덧널무덤의 외형은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 봉토분이다. 구조는 땅 속 깊숙이 판 구덩이 바닥에 나무로 된 각재(角材)를 이중으로 쌓고, 다시 각재를 방형(方形), 즉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쌓아올려서 네 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부 한쪽에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칸막이를 하여 장방형 내곽(內槨)을 만들었으며, 다시 두 겹 각재로 천장을 덮었다. 목관은 칸막이를 한 내곽 안에 놓이며, 부장품은 내곽 바깥에 들어가게 된다.
목관에는 보통 부부 두 사람의 시신이 들어가게 되며, 침향(枕向)1)은 모두 북침인데, 남자는 서쪽 여자는 동쪽을 차지하게 된다. 또 부부 외에 자녀들도 같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목관은 15센티미터 두께의 매우 두꺼운 판자를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서 만들었다. 관의 형태는 머리 쪽이 넓이나 높이가 약간 컸다. 이러한 관은 매우 무거워 운반하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한나라에서 쓴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에서는 후장(厚葬)2)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그 무거운 관을 중국 본토에서 낙랑군까지 운반해갔다”라고 지적할 정도였으니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목관 안의 시신은 명주로 여러 겹 감겨 있으며, 보통 가슴 위에 벽(璧)이라고 불리는 옥제 장신구가 놓여 있다. 두 손에는 옥돈(玉豚)이 쥐어져 있으며, 신체의 코와 귀, 입 그리고 두 개의 배설구 등 아홉 구멍에는 옥으로 만든 마개가 있다. 입에는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는 매미처럼 생긴 구슬로 반함(飯含)3)을 하였다. 이처럼 염을 할 때 옥을 많이 사용한 것은 시신의 부패를 더디게 하는 일종의 방부 처리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또 죽은 자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나무와 은으로 만든 도장을 허리 근처에 놓았다. 이러한 모습에서 옛날 중국 장례 풍습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 무덤 시신을 염한 모양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드문 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벽돌로 널방[玄室]을 축조한 벽돌무덤으로, 벽돌은 중국에서도 한나라 이래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낙랑의 벽돌무덤도 같은 계통으로 낙랑 후기, 즉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경까지의 시기에 나무덧널무덤에 이어 많이 세워졌다. 벽돌무덤의 방은 지하에 만들어지지만 거의 절반 이상이 땅 위로 올라와 있으며, 그 위에 흙이 덮여 있다. 널방은 사각형이지만 벽면의 위가 안쪽으로 기울어 반원형의 궁륭(穹窿) 천장을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남쪽에 문이 마련되어 있어 이 문을 통해 매장이 이루어졌다.
흙이 흔하고 돌이 귀한 중국에서는 무엇이든지 벽돌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집은 물론 성벽과 절의 탑에 이르기까지 용도가 다양하다 보니 무덤에 벽돌을 쓴것은 당연한 것이다. 반면에 돌이 흔한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돌로 세워지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벽돌무덤은 한동안 유행하다 곧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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