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흙 위로 삐져나온 사람 발... 민간인학살 직후 사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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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10.17. 오전 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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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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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워닝턴 기자가 찍은 '골령골 죽음의 계곡', 대전 동구청 12월 전시 예정

[심규상 대전충청 기자]

 [발굴사진]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한 직후 현장 모습이 담긴 사진이 확인됐다. 총을 멘 북한군 5명과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4명이 한 줄로 늘어서 시체가 묻힌 구덩이를 응시하고 있다.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발굴사진] 인근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북한군에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1950년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끝난 직후 현장 모습이 담긴 사진이 추가 확인됐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1910~1983)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사진에는 학살 직후 유해가 드러난 모습과 함께 산세 등 당시 지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장면이 들어 있어 사건의 진상 파악과 유해 매장지 추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전 동구청 국제협력특보(아래 국제특보)인 영국인 데이빗 밀러(40)씨는 위닝턴 기자가 남긴 자료와 유품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 셰필드 대학의 자료실에서 여러 장의 골령골 현장 사진을 확인했다고 15일 <오마이뉴스>에 알려왔다. 셰필드 대학은 위닝턴 기자가 남긴 취재수첩 등 기록을 소장하고 있다.
     
앨런 위닝턴 기자는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상황과 그 영향을 보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와 대전 산내 학살에 대한 기사를 타전했다. <데일리 워커>는 1950년 11월, 특집판으로 생생한 현장 사진과 함께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보도하기도 했다.

1950년, 군경에 의해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산내 학살이 끝난 직후 북한군과 함께 현장을 방문한 그는 같은 해 9월, <데일리 워커> 지에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으로 골령골 학살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묘사해 사진과 함께 타전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냄새는 목구멍까지 스며들어와 그 후 며칠 동안이나 그 냄새를 느껴야 했다.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위닝턴 기자의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 기사 중에서)

실제 기사 사진에는 살해 후 대충 묻혀 구덩이 밖으로 손과 다리가 삐져나온 시신의 모습이 실려 있다(관련 기사 : "죽음의 구덩이, 삐져나온 손·발·머리" http://bit.ly/4nW5Rt).

당시 소하천, 도로 모습 담겨... 유해매장 추정지 파악 도움될 듯
     
 [발굴사진] 시신을 아무렇게나 묻어 흙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보인다.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이 발가락 쪽으로 추정된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이날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가 세필드 대학에 있는 위닝턴 취재자료에서 찾은 사진에는 당시 <데일리 워커> 지에 실린 동일한 장면의 사진 외에 그동안 미공개된 사진이 여러 장 확인됐다.

우선 골령골 골짜기 전경이 담긴 사진이 눈에 띈다. 골짜기 봉우리 모양과 산세를 보면 골령골이 틀림없다. <오마이뉴스>가 골령골 1학살지와 2학살지로 이름 붙인 곳이 대부분 화면에 들어 있다. 당시 소하천과 도로 모양도 잘 드러나 있다.

당시 목격자들은 2학살지의 경우 폭 2m의 구덩이의 길이가 200m에 달하는 데 길가를 따라 구덩이를 팠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로가 확장·포장 됐고 위치도 많이 변해 정확한 암매장지를 찾기 힘든 상태다. 이 사진은 유해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 사진] 골짜기 봉우리 모양과 산세를 보면 지금의 대전 동구 낭월동 골령골의 모습과 동일하다. <오마이뉴스>가 골령골 1학살지와 2학살지로 이름 붙인 곳이 대부분 화면에 들어 있다. 멀리 대전 보문산 자락이 보인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또 다른 사진에는 총을 멘 북한군 5명과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4명이 한 줄로 늘어서 시체가 묻힌 구덩이를 응시하고 있다. 이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에 시체로 보이는 밖으로 드러난 희끗희끗한 물체가 보인다.

다른 사진에는 아무렇게나 묻어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 다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시체가 삐져나온 장면은 위닝턴 기사의 당시 보도기사에 실린 사진과 같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구덩이가 음푹 꺼져 땅이 갈라져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다.
        
미군이 현장에 버린 빈 담뱃갑과 탄피를 찍은 사진도 보인다. 위닝턴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땅에 버려진 빈 담뱃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은 모두 미제였다.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며 "이런 살인극은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나는 한 움큼의 M-1과 카빈 탄약통을 주웠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썼다. 이 사진은 기사에 등장한 '미군이 버린 빈 담뱃갑'으로 추정된다. '카빈 탄약통'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도 있는데 불명확하다.

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은 "사건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매장지를 추정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며 " 대전 동구청의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발굴사진] 희생자 유해(위 붉은 원안)로 보인다. 위닝턴 기자는 기사에서 "땅에 버려진 빈 담배 갑들과 놓여 있는 수천 개의 탄약통은 모두 미제였다. 미군 장교들이 한국군 장교들과 매일 지프를 타고 와서 학살을 감독했다"며 "이런 살인극은 미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대전 동구청, 셰필드 대학에 직원 파견 성과

대전 동구청(청장 황인호)은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을 보도한 위닝턴 기자의 자료를 받기 위해 셰필드 대학 측과 자료 제공 및 상호 파트너십 구축 방안 등을 협의해 왔다. 이를 위해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가 셰필드 대학을 방문 중이다. 데이빗 밀러 국제특보는 방문 기간 중 위닝턴이 남긴 주요 자료를 스캔해 오는 12월, 동구청 주최 관련 전시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지난 달 22일부터 40일간의 일정으로 골령골 제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16일 현재까지 수습한 유해는 40~42구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최소 4000명, 최대 700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1950년 7월 첫째주에 찍은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영국 <데일리 워커>의 위닝턴 기자가 찍은 위 사진과 비슷한 장소다. 앨런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시체가 부패하면서 구덩이가 움푹 꺼져 땅이 갈라져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보좌관제공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이었던 앨런 위닝턴 기자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직후 유해가 매장된 모습을 목격하고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의 기사.
ⓒ 심규상

 
 1950년 9월, 영국 <데일리 워커> 지에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제목으로 실린 위닝턴 기사와 사진 . 위닝턴 기자는 기사에서 사진과 함께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 드러나 있었다"고 썼다. 대전 동구 골령골의 행정동 이름이 '낭월(Rangwul)'이다. 위닝턴 기자는 골령골 학살 현장의 참혹한 광경을 묘사해 사진과 함께 타전했다.
ⓒ 심규상

 
 당시 현장에 미군이 버린 빈 담뱃갑과 탄피(붉은 색 원안)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또는 8월,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방문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찍었다.
ⓒ 데이빗 밀러 대전동구청 국제협력특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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