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369 任那 > 0372 七枝刀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백제왕이 말하기를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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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칠지도명(七支刀銘)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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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칠지도명(七支刀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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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칠지도명(七支刀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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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10 日本書紀(720)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 久氐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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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10 日本書紀(720)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계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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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10 日本書紀(720)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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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10 日本書紀(720)
▐ 신공황후조의 46년부터 65년까지의 기록은 364년에서 385년 사이의 백제 기록을 옮긴 것인데, 왜와 백제가 외교관계를 트고 함께 반도 남부를 정벌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七枝刀는 이 시기 왜와 백제의 우호 관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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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10 日本書紀(720)
▐ 七枝刀란 명칭은 七支刀라 불리며 전해내려오는 칼의 형상과 일치하고 孫枕流王이 언급된 내용은 七支刀에서 언급된 王世子 이야기와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칼로 간주된다. 백제와 왜가 교류를 시작한 것은 366년부터이나 군사적 협력을 통해 반도 남부를 분점한 것은 369년이기 때문에 七支刀의 내용으로 보아 그 제작시기는 369년이나 그 이후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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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 辰斯→阿花
❶ 日本書紀(720) 0272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紀角宿禰는 백제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92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阿莘王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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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우전팔번신사 인물화상경
우전팔번신사의 인물화상경에는 '계미년에 斯麻가 男弟王의 장수를 기원하며 거울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다. 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계미년도 무령왕의 재위 기간에 들어 있다. 503년 계미년으로부터 4년 뒤 무열천황이 죽자, 지방에 있던 男大迹王이 男大迹天皇으로 추대된다. 男大迹天皇은 백제에게 임나 四縣을 주었고, 己汶을 놓고 백제와 가라가 대립하였을 때는 백제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또 가라의 多沙津을 떼어 백제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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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3 홍성화
칠지도에 대해서는 369년에 백제가 제작하여 372년에 왜왕에게 주었다는 것이 한국학계의 통설이다. 홍성화는 새로운 판독결과를 가지고 4~6세기 사이에 11월16일이 丙午인 날로 범위를 좁히고 다시 그 중에서 408년이 정황에 맞는 제작연도로 보았다. 나아가 고구려(광개토대왕)와 신라(법흥왕)가 독자연호를 쓰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칠지도에도 백제의 독자연호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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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3 홍성화에 대한 반론 1
396년에서 409년 사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에 어려움을 겪자 왜를 끌어들여 대응했던 시기다. ▐ 기록에는 왜가 404년에 고려의 대방 지역을 침공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고려와 충돌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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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3 홍성화에 대한 반론 2
백제가 군대를 파견해준 왜왕을 侯王의 지위로 승인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이라는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백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히는 의미에서 칠지도를 하사했다. ▶전지왕은 왕자 시절인 397년에 왜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405년에 아신왕이 죽자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그런 전지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다면 그건 조공이지 하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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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支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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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협(蓂莢)
중국 요임금 때 났었다는 전설상의 상서로운 풀.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하루에 한 잎씩 났다가, 열엿새부터 그믐까지 하루에 한 잎씩 떨어지고, 작은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았다 하여, 달력 풀 또는 책력 풀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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