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0698~0926 渤海

▐ 구당서(945)에는 靺鞨과 渤海靺鞨이 따로 기술되어 있는데 靺鞨에는 黑水靺鞨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신당서(1060)에는 黑水靺鞨과 渤海가 따로 기술되어 있는데 渤海는 원래 粟末靺鞨이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渤海는 黑水部과 함께 靺鞨을 구성했던 粟末部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금사(1344)에는 靺鞨을 구성했던 7部 중 粟末部과 黑水部만 당나라 초에 남아 있다가 粟末靺鞨은 渤海가 되고 黑水靺鞨은 이 渤海에 종속되었다고 되어 있다.
 
-0037~0668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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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三國史記(1145)
國夲有 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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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三國史記(1145)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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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三國史記(1145)
英公以王寳臧·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迴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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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舊唐書(945)
移高麗戶二萬八千二百 車一千八十乘 牛三千三百頭 馬二千九百匹 駝六十頭 將入內地 萊營二州般次發遣 量配于江、淮以南及山南、並、涼以西諸州空閒處安置 고려의 2만 8천호와 수레 1천 80승, 소 3천 3백두, 말 2천 9백필, 낙타 60두를 내지로 끌고 왔다. 내주, 영주 2주 백성을 보내어 강회 이남과 산남에 병주, 양주의 서쪽 빈터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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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舊唐書(945)
高麗國舊分爲五部有城百七十六戶六十九萬七千 고려국은 지난날에 5부로 나뉘어져 176성 69만 7천호가 있었다. 乃分其地置都督府九州四十二縣一百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현으로 하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총관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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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高麗의 해체
0668+ 高麗의 해체
漢五郡 = 樂浪郡·眞番郡·臨屯郡·玄菟郡·遼東郡 ➔ 高麗 = 貊·濊·沃沮·夫餘 + 樂浪·帶方·遼東 ➔ 渤海 = 高麗 - 樂浪·帶方·遼東 + 靺鞨 = 鴨淥府·南海府·柵城府·扶餘府 + 靺鞨 ➔ 女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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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6 舊唐書(945)
渤海靺鞨의 대조영은 본래 高麗의 별종이다. 高麗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696년에 契丹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祚榮은 靺鞨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진충이 죽자 측천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여당을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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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6 舊唐書(945)
조영이 高麗·靺鞨의 무리를 연합하여 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사는 크게 패하고 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마침 契丹과 奚가 모두 突厥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은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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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6 新唐書(1060)
696년에 契丹의 진충이 營州都督 조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舍利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靺鞨의 추장 걸사비우 및 高麗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遼水를 건너서 太白山의 동북을 거점으로 하여 奥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무후는 걸사비우를 許國公, 걸걸중상을 震國公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다.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무후는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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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8~0699 舊唐書(945)
祚榮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하자, 靺鞨의 무리 및 高麗의 여당이 점점 모여 들었다. 698~699년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땅은 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越憙靺鞨에서 동북으로는 黑水靺鞨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이며 편호는 십여만이고 승병은 수만명이다. 풍속은 高麗 및 契丹과 같고 문자 및 전적도 상당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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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3 구당서(945)
중종이 즉위하여, 侍御史 張行岌을 보내어 招慰하니, 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入侍시켰다. 이때 책립을 하려 하는데, 마침 글단과 돌궐이 해마다 변경을 침입하므로 사명이 전달되지 않았다. 睿宗 선천 2년에 낭장 崔訢을 보내어 조영을 책봉하여 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으로 삼고,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로 삼아서 홀한주도독의 직을 더 주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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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9 구당서(945)
조영이 죽으니,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제하고 이어서 그의 적자 계루군왕 대무예를 책립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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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속일본기(797)
도도진경진사 종7위상 제군안남 등 6인을 말갈국에 보내어 그 풍속을 관찰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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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속일본기(797)
사신을 보내어 고제덕 등에게 의복과 관, 신발을 내렸다. 발해군이란 옛날의 고려국이다. 668년 겨울 10월에 당(唐)의 장군 이적이 고려를 정벌하여 멸망시켜 그 후로 조공이 오랫동안 끊어졌다. 이에 발해군왕이 영원장군 고인의 등 24인을 보내어 조빙하게 했는데, 하이(아이누)의 경계에 도착하여 인의 이하 16인은 모두 살해되고 수령 제덕 등 8인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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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8 속일본기(797)
고제덕 등이 왕의 교서와 방물을 바쳤다. 그 교서에, "무예(무왕)는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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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9.11 속일본기(797)
광성은 천평 5년(733)에 입당했다. 6년에 일을 마치고 소주(상해 인근)로부터 바다로 나갔다. ... 곤륜국(월남)에 표착했는데 붙잡히게 되었다. ... 몰래 배를 타고 당(唐)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 발해로를 통하여 귀국할 것을 청했더니 천자가 허락하고 ... 10년에 등주(산동)에서 바다로 들어가 발해에 이르렀다. 그 왕 대흠무가 사신을 뽑아 우리 조정에 보내려고 하여 함께 출발했다. ... 광성 등은 출우국(일본 북서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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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9.12 속일본기(797)
발해 사신 기진몽 등이 조정에 배알했다. 발해 왕의 계(啓)와 방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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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0.01.01 속일본기(797)
천황이 대극전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군의 사신과 신라학어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단지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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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9 속일본기(797)
천황이 임석한 가운데 고려 사신 양승경 등이 방물을 바치고 아뢰기를 “고려국왕 대흠무가 아룁니다.”라 하였다. 조를 내리기를 “고려국왕이 멀리서 전왕이 천궁으로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양승경 등으로 하여금 와서 위문하게 하였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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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0860~0873 발해의 행정구역
발해는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을 각각 부여부, 용원부(책성부), 남해부 그리고 압록부로 편제하였다. 왕고는 발해가 망하기 전에 세워졌으니 부여, 예맥, 옥저 그리고 고려의 옛 땅은 일단 왕고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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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0
처음에 그 나라의 王이 자주 학생들을 京師의 太學에 보내어 古今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 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海東盛國이 되었다. 국토는 5京·15府·62州이다. 국토는 5경·15부·62주다.
20080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01
숙신(肅愼)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으니 용천부(龍泉府)이며 룡(龍)·호(湖)·발(渤)의 3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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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2
그 남부로 중경(中京)을 삼으니 현덕부(顯德府)이며 노(盧)·현(顯)·철(鐵)·탕(湯)·영(榮)·흥(興)의 6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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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3
예맥(예貃)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慶)·염(鹽)·목(穆)·하(賀)의 4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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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3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2662#15031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04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沃)·청(晴)·초(椒)의 3주를 통치한다.
19997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05
고려(高麗)의 옛 땅으로 서경(西京)을 삼으니 압록부(鴨淥府)이며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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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6
장령부(長嶺府)는 하(瑕)·하(河)의 2주를 통치한다.
19998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07
부여(扶餘)의 옛 땅에 둔 부여부(扶餘府)에는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는데 부(扶)·선(仙)의 2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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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08
막힐부(鄚頡府)는 막(鄚)·고(高)의 2주를 통치한다.
19999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09
읍루(挹婁)의 옛 땅에 둔 정리부(定理府)는 정(定)·심(潘)의 2주를 통치한다.
20005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10
안변부(安邊府)는 안(安)·경(瓊)의 2주를 통치한다.
20006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11
솔빈(率賓)의 옛 땅에 둔 솔빈부(率賓府)는 화(華)·익(益)·건(建)의 3주를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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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12
불열(拂涅)의 옛 땅에 둔 동평부(東平府)는 이(伊)·(蒙)·(沱)·흑(黑)·비(比) 5주를 통치한다.
20017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13
철리(鐵利)의 옛 땅에 둔 철리부(鐵利府)는 광(廣)·汾·蒲·해(海)·의(義)·귀(歸)의 6주를 통치한다.
20038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14
월희(越喜)의 옛 땅에 둔 회원부(懷遠府)는 달(達)·월(越)·회(懷)·기(紀)·부(富)·미(美)·복(福)·사(邪)·지(芝)의 9주를 통치한다.
20040 SHARED
 
0860~0873 新唐書(1060) 15
안원부(安遠府)는 영(寧)·郿·모(慕)·상(常)의 4주를 통치한다. 또 영(郢)·고(錮)·속(涑)의 3주를 독진주(獨秦州)로 삼았다. 속주(涑州)는 그곳이 속말강(涑沫江)과 가까운데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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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20
0860~0873 新唐書(1060) 20
▐ 발해의 조공길은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 황해로 들어간 뒤 해안을 따라 간 듯하다. 당나라에서 보자면 그들이 발해를 통해 들어와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당나라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의 벼슬을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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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新唐書(1060) 20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길이고 남해(南海)는 신라길이다. 압록(鴨湪)은 조공길이고 장령(長嶺)은 영주(營州)길이며 부여(扶餘)는 거란길이다.
20079 SHARED
 
0897 謝不許北國居上表 (최치원)
初建邑居來憑鄰援其酋長大祚榮始授臣蕃第五品大阿餐之秩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이웃으로서 접하고자 왔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제5품 벼슬인 대아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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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년경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髙句麗殘孽類聚 北依大白山下 囯號爲渤海 고구려의 유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대백산 아래에 기대어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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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三國史記(1145)
평양 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23540 SHARED
 
0905 安鶴宮
0427 移都平壤┆0905 平壌城主将軍黔用降┆1081 去京東西各十餘里 更卜地 構左右宮闕
2662#23539 SHARED
 
0945 舊唐書 01
渤海靺鞨의 대조영은 본래 高麗의 별종이다. 高麗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營州로 옮겨와 살았다. 696년에 契丹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祚榮은 靺鞨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진충이 죽자 측천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여당을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19718 SHARED
 
0945 舊唐書 02
조영이 高麗·靺鞨의 무리를 연합하여 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사는 크게 패하고 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 마침 契丹과 奚가 모두 突厥에게 항복을 하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은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19719 SHARED
 
0945 舊唐書 03
祚榮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하자, 靺鞨의 무리 및 高麗의 여당이 점점 모여 들었다. 698~699년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그 땅은 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越憙靺鞨에서 동북으로는 黑水靺鞨에 이르는데 사방이 2천리이며 편호는 십여만이고 승병은 수만명이다. 풍속은 高麗 및 契丹과 같고 문자 및 전적도 상당히 있다.
19721 SHARED
 
0945 구당서(舊唐書) 北狄列傳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 글단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해지를 차지하여 수비를 굳혔다. ...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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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新唐書 01
渤海는 본래 粟末靺鞨로서 高麗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大씨다. 高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挹婁의 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新羅와 맞닿아 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契丹과 성곽을 쌓고 사니 高麗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19722 SHARED
 
1060 신당서(新唐書) 北狄列傳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다. 고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글단과 [접하고 있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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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5 송사(宋史)
발해는 본래 고려의 별종(別種)이다. 당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서는 그 사람들을 옮겨 중국에 살게 하였다. 측천무후 만세통천 연간(696)에 거란이 영부(營府)를 공격하여 함락하니,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웅거하였고, 예종은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발해국이라 자칭하고 부여, 숙신 등 10여 국을 병합하였다. 당(唐), 량(五代梁), 후당(五代唐)에 이르기까지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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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김정일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10세기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고려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대동강 이남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멀리 북쪽에서 이주하여 온 발해의 유민들까지도 하나의 주권 밑에 통합하였으며 광활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힘찬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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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7차교육과정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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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 - 임상선
“발해 유민은 발해 멸망 이후 약 200년간 어디에 살건 거란인, 송(宋)인, 고려인이 아니라 발해인으로 자칭했고 그렇게 분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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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京龍泉府
渤海国上京龙泉府遗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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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牟山
城山子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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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호 연구 - 최진열
당나라는 고려란 명칭을 사용하기 싫어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란 작위를 내렸다. 고려 보장왕에게 조선군왕이란 작위를 내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발해란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고려 유민들이 당나라에서 발해 고씨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발해는 바다 이름이기도 하지만 고려 유민들이 자처한 발해는 한나라때부터 있었던 하북의 한 군의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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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막기문 발해국
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가 그 나라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멸망시키고 그의 명장(名帳)에 있는 발해인 천여 호를 연(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거란이 강제 이주시킨 백성은 늘어나 5천여 호에 달하였고 훌륭한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금나라는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산동(山東) 지방의 국경을 지키도록 보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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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된 부여·예·맥·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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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발해(渤海)는 고려가 망한 지 30여년 뒤인 698년 고려의 유민 대조영이 세운 왕조인데 200여 년 간 왕조를 이어가다 926년 요(遼)에 병합되었다. 발해는 중심지와 주류 종족이 고려와 다르지만 당(唐)이나 신라에 비해 고려의 영토와 백성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또 스스로도 고려의 계승국을 표방함으로써 고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요흑사의 계통은 부정하기 힘들다. 0728 속일본기(続日本紀 797 日本)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무예(무왕)는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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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한국사가 아니다.
발해가 한국사라는 주장은 이렇다. 고려가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그 발해는 고려계승을 표방하였으며 또 망할 때 왕자 대광현과 수만 명의 발해 유민이 왕고로 왔으니, 결국 고려의 역사는 발해로 이어졌고 발해의 역사는 왕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발해가 고려의 역사를 이었다는 부분은 맞는 말이다. 여기서는 발해가 고려의 역사를 이었지만 고려인의 나라는 아니라는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구당서(945)에 의하면 대조영은 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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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6~1125 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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