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는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함께 7국과 4읍을 점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범위는 서로는 차현까지 이르고 동으로는 팔공산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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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7 日本書紀(720)
탁순왕 말금한기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 7월 중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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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3 日本書紀(720)
사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내었다.
사마숙니는 종자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색비단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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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3 日本書紀(720)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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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03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또 구저(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니(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7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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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日本書紀(720)
이 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저(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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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日本書紀(720)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襲津彥)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사지비궤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7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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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日本書紀(720)
백제의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倭)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기각숙니·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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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5 三國史記(1145)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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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8 三國史記(1145)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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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광개토왕릉비(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8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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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광개토왕릉비(414)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8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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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광개토왕릉비(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 옛적에는 新羅寐錦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8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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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日本書紀(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8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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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08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의 조상인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8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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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광개토왕릉비(414)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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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9 三國史記(1145)
腆支王은 阿莘이 재위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腆支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腆支는 왜인을 머물러 두어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나라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腆支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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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양서(636)
晉安帝時有倭王贊 贊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
진나라 안제때 왜왕 贊이 있었다.
-- 진서의 기록을 토대로 시기를 413년으로 특정한다.
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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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1.03 日本書紀(720)
대초료존(인덕)이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하였다. 궁전을 난파에 지었는데, 이것을 고진궁(高津宮)이라 한다. 궁전의 담장과 건물에는 흰색을 칠하지 않았다. 서까래, 들보, 기둥도 장식하지 않았다. 억새로 지붕을 이을 때에도 끝을 가지런히 하지 않았다. 이는 사사로운 이유로 백성이 밭을 갈고 베 짜는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었다.
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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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519 황남대총과 대선릉고분
위의 왼쪽 가운데 쌍분이 황남대총이고 오른쪽 전방후원분이 대선릉고분이다.
황남대총은 350~450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선릉고분은 인덕 천황(433~519)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길이가 120m와 525m로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크다.
일본서기에는 인덕 천황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궁전을 검소하게 지었다고 하는데 무덤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8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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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 송서(488)
(元嘉十五年夏四月己巳)
以倭國王珍為安東將軍
왜국왕 珍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是歲 武都王 河南國 高麗國 倭國 扶南國 林邑國並遣使獻方物
이해에 무도왕, 하남국, 고려국, 왜국, 부남국, 임읍국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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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 송서(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 송서 본기 문제 원가 15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38년으로 특정하였다.
8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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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송서(488)
(元嘉)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并除所上二十三人軍郡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軍과 君을 제수하였다.
-- 왜가 요청한 6개 나라에서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주었다.
8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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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송서(488)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조하여 "왜왕의 세자 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 송서 효무제 대명 6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62년으로 특정한다.
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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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宋書(488), 南史(659)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동으로 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 眾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海北 95국을 평정하였습니다.
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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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宋書(488), 南史(659)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句驪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고 하고 변방에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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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大和 やまと) 왕조
아래의 倭는 동일한 왕조라고 보아야 한다.
391년에 한국에 진출해서 백제와 손을 잡고 가라와 신라를 점령하였으며 404년에 고려의 대방 지역을 침공하였다는 倭 - 광개토왕릉비(414)
397년에 백제로부터 볼모를 받았다가 405년에 백제의 왕이 죽자 그 볼모를 돌려보내 백제의 왕위를 잇게 하였다는 倭 - 일본서기(720)와 삼국사기(1145)
413년에 讚이라는 왕이 있었고 478년까지 珍, 濟, 興 그리고 武라는 왕이 이어지며 유송에 조공을 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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