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솔까역사 > 0943 훈요십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견훤백제가 있던 전주 사람들이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있으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전주를 전라도로 왜곡했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왕건이 훗날 전라도로 합쳐지는 무주 사람들을 기용한 예를 들어 훈요십조가 조작되었다고 했다.
 
0516  己汶 분쟁 직후
0516 己汶 분쟁 직후
백제는 새로 획득한 4현과 상기문을 추가해서 영토를 22담로로 묶었다. 이때의 영토는 훗날의 신라 웅주와 전주를 합한 것과 같다. 영산 지역은 신라 무주에 해당되는데 이때까지는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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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2 三國史記(1145)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 고대에는 점령한 지역의 반란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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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4 三國史記(1145)
강수는 중원경 사량부 사람이었다.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왕 앞에서 한 번 보고는 설명하고 해석하였는데 머뭇거리거나 막힘이 없었다.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任那加良사람으로 이름은 우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 고령에 있었던 가라가 조령 너머에 있는 충주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후 그 주민들이 충주로 사민된 결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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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4 增補文獻備考(1903~1908)
忠州牧. 본래는 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狼子谷城이라 하였다. 狼子城이라고도 하고 未乙省이라고도 한다. ▐ 이는 삼국사기 강수 열전을 오독한 결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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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7 新羅 9주5소경
0757 新羅 9주5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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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三國史記(1145)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갑자기 왕경(경주)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경애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군대 진영으로 잡혀갔는데,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강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왕의 친척 동생을 권지국사로 세우니, 그가 경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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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 高麗史(1451)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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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 왕이 내전에 나아가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를 내렸다. 十訓之終皆結中心藏之四字嗣王相傳爲寶 십훈의 끝은 모두 ‘마음속에 이를 간직하라’는 네 글자로 맺었는데, 후대의 왕은 이를 서로 전하여 보배로 삼았다. ▐ 박술희에 대해서는 열전에서 혜성군 사람이고, 아버지는 대승 박득의라고 되어 있다. 혜성군은 신라 웅주의 군으로 지금의 당진이다. 박씨신라선원세보에는 박득의가 박제상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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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②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으로,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후비·조신이 각각 원당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 말에 다투어 사원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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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②
▐ 왕건은 도선과 그의 풍수지리설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신라 무주 영암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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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④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중국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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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④
▐ 왕건은 926년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데 대한 보복으로 942년에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인 바 있다. 927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집단 강간한 데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란에 대한 경계는 훈요십조 4조에 담겨 있고 견훤백제의 유민에 대한 경계는 훈요십조의 8조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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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⑧
❶車峴以南公州江外❷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 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❸㗸統合之怨犯蹕生亂 차현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거스르게 뻗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후나 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사를 잡게 되면, 국가의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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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高麗史(1451) ⑧
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 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災變者必有之矣 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또 일찍이 관청에 예속된 노비와 진‧역의 잡척이 권세가에게 투탁하여 신분을 옮기거나 역을 면제받기도 할 것이며, 왕후나 궁원에 빌붙어 간교한 말로 권력을 희롱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하여 재앙에 이르게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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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2조, 4조 그리고 8조
▐ 車峴以南公州江外 사람을 쓰지 말라는 이유로 山形地勢並趨背逆과 統合之怨을 들고 있다. 전자는 풍수지리적인 미신에 따른 것이고 후자는 견훤백제의 유민을 경계한 것이다. 왕건이 풍수지리설에 심취한 사실은 2조에도 나타난다. 견훤백제의 유민에 대한 경계는 거란에 대한 경계가 담겨있는 4조와 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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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❶車峴以南公州江外
▐ 公州江外는 개경에서 보았을 때 금강 너머, 즉 금강 남쪽을 말한다. 차현 바로 아래에 금강이 있으니 車峴以南과 公州江外는 의미가 중복된다. @차현 @車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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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❷山形地勢並趨背逆
0943¦❷山形地勢並趨背逆
▐ 한국의 강은 대체로 서, 남 그리고 동으로 일정하게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금강은 특이하게 상류에서는 북쪽으로 흐르다 계룡산을 돌아서는 남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背逆은 이걸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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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❸㗸統合之怨
▐ 통합당한 원한을 품었을 것이라는 염려는 견훤과 궁예를 직접 겪어본 왕건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견훤은 "今子敢不立都扵完山 以雪義慈宿憤乎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말했고 궁예는 "平壌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讎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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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왕고 10도
0995 왕고 1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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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江南道
금강을 기준으로 하여 그 남쪽에 강남도를 설치하고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舜州)·마주(馬州) 등 9주 43현을 소관하게 하였다. ▐ 여기서 江南은 금강 남쪽을 말한다. 그러나 江南道는 남해안까지 이르는 금강 남쪽 전체를 관할한 것이 아니라 금강에서 蘆嶺 산맥까지만 관할했고 蘆嶺 산맥에서 남해안까지는 해양도가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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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노령 @蘆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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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海陽道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郎州) 등 14주 62현을 소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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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高麗史(1451)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❶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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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삼례 @參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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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장곡 @長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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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훈요10조 보완
▐ 거란이 침공해 왔을 때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삼례를 지나 전주에서 묵으려다 그만두고 곧장 장곡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현종은 장곡에서도 고초를 겪게 된다. 여기서는 훈요10조와 달리 왕건이 꺼려한 지역이 전주로 범위가 좁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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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왕고 5도 양계
1012± 왕고 5도 양계
▐ 강남도와 해양도를 묶어 전라주도가 만들어졌다. 고대부터 별개로 취급되던 만경·동진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은 이때부터 전라도 하나로 묶여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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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高麗史(1451)
이지영이 삭주분도장군이었을 때 양수척이 흥화도와 운중도에 많이 살았다. 거란군이 오자 기꺼이 항복하고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거란군은 산천의 주요 지형과 도로의 사정을 훤히 알게 되었다.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때 제압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후손들로서, 본래 관적과 부역이 없었으며, 수초가 자라는 곳을 따라 일정한 거처가 없이 옮겨 다니면서 사냥을 일삼고 유기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기생 무리는 본래 유기장 집안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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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 高麗史(1451)
▐ 삭주는 서남쪽으로 의주와 접했고 북쪽으로는 압록강에 접했다. 흥화도는 청천강에서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운중도는 평양과 압록강변을 이어주는 길로 흥화도의 동쪽에 있었다. 신라는 가라를 병합한 뒤 가라인을 충주로 이주시킨 듯하며 백제는 신라 대야성을 함락시킨 뒤 그 주민들을 백제 서부로 이주시켰다. 왕고도 견훤백제를 병합한 뒤 그 유민들을 서북 지역으로 이주시켰을 가능성은 존재하며 그것이 양수척의 기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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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이씨왕조의 뿌리
1392 이씨왕조의 뿌리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의 토착 세력이었는데 관기의 문제로 다툼이 생기자 함경도로 도피하였다. 이후 그곳이 원나라의 통치 하에 들어가자 원나라에 부역하였다. 이안사가 원나라로부터 받은 벼슬은 이행리와 이춘 그리고 이자춘으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자 이자춘은 왕씨고려의 편에 붙어 원나라의 잔당을 퇴치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그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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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 왕씨멸족
이성계는 왕조를 창업한 후 후환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전의 왕씨 왕족을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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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世宗實錄 세종 22년
❶全羅道❷山水背注人心至險 然不可以人心之險惡强加鞭扑也 전라도는 산수가 배치하여 쏠리고 인심이 지극히 험하나, 인심이 험악하다고 해서 억지로 편복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왕건의 車峴以南公州江外는 세종에 와서 全羅道로 바뀌어 있다. 전주와 무주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山形地勢並趨背逆은 山水背注로 간략해졌는데 의미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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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睿宗實錄 예종 1년
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이라는 것은 전조(왕씨고려)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화도 천도시기 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과 백정은 충렬왕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 1469년으로부터 5, 6백년 전이라면 견훤백제가 망할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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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 成宗實錄 성종 3년
自三國以來百濟最爲忲侈爲君長者不能道之以方驕奢淫酗上下比德財殫力竭竟至於亡 今之❶全羅道卽其舊地❸其燕會喪葬不循禮度頑風淆俗至今猶在 삼국 이래로 백제가 가장 사치함을 일삼아 군장이 된 자가 올바른 방법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교사하고 음탕하며 술을 좋아함이 상하가 비덕하여 재물이 바닥나고 힘이 고갈되어 마침내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지금의 전라도는 곧 그 옛땅으로서 그 연회와 상장에서 그 예도를 따르지 않고 완악한 기풍과 흐려진 풍속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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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忲侈 驕奢 淫酗
▐ 백제 의자왕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3년 뒤에는 甄萱餘習을 비난하고 있어 백제와 견훤백제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치, 교만, 음란, 음주 등은 왕건의 山形地勢並趨背逆이나 統合之怨 그리고 세종의 山水背注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종은 풍수지리는 탓하지 않고 백제가 남긴 풍습만 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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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 成宗實錄 성종 6년
❶全羅道古百濟地也 民染❸甄萱餘習至今未能盡變故其俗如是 전라도는 옛 백제의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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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 成宗實錄 성종 10년
“전라도의 풍속이 어떠한가? 내가 들으니 백제의 남은 풍습이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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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 成宗實錄 성종 19년
전라 1도는 옛 백제의 터니, 그 유풍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완한한 풍속이 다른 도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 도적은 혹 집에 불을 지르거나 혹 길가는 사람을 저격하여 대낮에 양탈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湖南之俗有强盜 無竊盜者 호남의 습속은 강도는 있어도 절도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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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明宗實錄 명종 10년
요사이는 인심이 완악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혐의나 원한이 있으면 보복하려고 생각하며 만일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그의 부모의 무덤을 파 헤쳐, 자기의 마음을 통쾌하게 합니다. 팔도 중에서 전라도가 이러하여, 앞서는 이미 부원군 임백령의 부모 무덤을 파 헤쳤고, 신해년에는 또한 지사 김인손의 부모 무덤을 파 헤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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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지역 편견의 흐름
▐ 편견 지역은 왕건의 車峴以南公州江外가 세종에 와서 全羅道로 바뀌었고, 편견 이유는 왕건의 山形地勢並趨背逆과 統合之怨이 세종에 와서 山水背注로 줄었고 성종에 와서 甄萱餘習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명종에 와서는 그것마저도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라도에 대한 편견 자체가 왕조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학자 이익과 이중환의 저서에서는 여전히 풍수지리적인 지역 편견이 나타나는데, 이는 왕건 이래의 관련 기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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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1764 星湖僿說(이익)
❶全羅一道之水其無䓁以東之水皆東入海以西之水皆南入海全州以西之水皆西入海其徳裕以北之水皆北流合扵錦江比如❷㪚髮四下不成局面此所以材徳罕出士大夫不可為依歸不但背逆扵車嶺以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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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1764 星湖僿說(이익)
전라도로 논한다면 1도의 물이 무등산 동쪽의 물은 모두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은 모두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전주 서쪽의 물은 모두 서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덕유산 이북의 물은 모두 북으로 흘러 금강과 합류가 되니, 비유컨대, 머리를 풀어 사방에 흩어진 것과 같아 국면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재주와 덕망 있는 자가 드물게 나오니 사대부로서는 거지로 삼을 곳이 못된다. 이는 차현 이북의 산수가 배역한 정도 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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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1764¦㪚髮四下
1671~1764¦㪚髮四下
▐ 㪚髮四下는 왕건의 山形地勢並趨背逆이나 세종의 山水背注와 전혀 다른 설명이다. 왕건의 車峴以南公州江外에는 적용할 수 없는 설명인데, 세종에 와서 全羅道로 바뀌면서 나오게 되었다. 전라도에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있는데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뜻이다. 전라도는 인간이 그어놓은 행정구역이다. 금강과 섬진강 수계를 떼어내고 전라도를 만들었으면 㪚髮四下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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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①
いまにしりゅう는 왕건이 남긴 유훈에 나오는 車峴以南公州江外를 전라도로 가정하고, 왕건이 전라도 출신의 인재를 많이 기용한 사실을 들어, 車峴以南公州江外 사람을 쓰지 말라고 한 그 유훈이 신라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전라도에 대한 차별의 책임을 경상도로 떠넘겨 식민지를 이간하려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장은 車峴以南公州江外가 전라도라는 가정을 부정하면 바로 무너진다.
8702 SHARED
 
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②
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②
公州江外는 개경에서 보았을 때 금강 너머, 즉 금강 남쪽을 말한다. 차현 바로 아래에 금강이 있으니 車峴以南과 公州江外는 의미가 중복된다. 왕고 초기의 江南道는 금강 남쪽에 설치한 행정구역인데, 금강에서 남해안까지를 다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금강에서 蘆嶺산맥까지만 관할하던 행정구역이었다. 그렇다면 車峴以南公州江外 또한 차현에서 남해안까지 차현 남쪽 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24694 SHARED
 
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③
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③
고대부터 만경·동진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은 별개의 문화권이었다. 각각 신라의 전주와 무주가 되었다가 왕고 초기에는 강남도와 해양도가 되었다. 전주는 왕건이 오래 싸워온 곳이고 무주는 그가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 곳이므로 왕건이 그 둘을 하나로 묶어 취급했을 거 같지는 않다. 왕건이 통합당한 원한을 품었으니 경계하라는 車峴以南公州江外를 전라도가 아닌 전주로 가정하면 앞뒤가 잘 맞아떨어진다. 왕건이 기용한 전라도 출신도 전주가 아니라 무주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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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④
1918 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 비판 ④
왕건 이후 옛 전주와 무주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기 때문에 세종과 그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전라도라 한 것이다. 2조에서 풍수지리설을 소개하고 신라의 멸망에 그것을 적용한 사람과 8조에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車峴以南公州江外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 같지 않고, 4조에서 짐승과 같은 풍습을 지녔다며 거란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과 8조에서 통합당한 원한을 품었으므로 車峴以南公州江外를 경계하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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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황현필
황현필도 왕건이 전라도 출신을 기용한 사례를 들어 車峴以南公州江外를 전라도로 해석하면 모순이 생긴다는 점을 いまにしりゅう와 똑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황현필은 車峴以南公州江外를 청주로 해석하여 그러한 모순을 피해갔다. 모순이 해소되면 조작설의 근거도 사라지지만, 황현필은 훈요십조가 신라계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 いまにしりゅう의 주장을 이어갔다. 전라도에 대한 차별의 책임을 경상도로 떠넘겨 지역감정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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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황현필
2023 황현필
황현필은 車峴以南과 公州江外가 중복되는 의미일 수 없다며 車峴以南公州江外를 車峴과 公州 사이의 지역으로 보고 淸州로 가정하였다. 이 가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① 지역을 가리킬 때 도읍인 개경을 기준으로 했을텐데 금강 북쪽에 있는 淸州를 公州江外라 할 수 있는가? ② 북쪽으로 흐르다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 금강처럼, 淸州의 풍수가 산의 모양과 땅의 기세가 모두 거스르게 뻗어 있는가? ③ 왕건의 시기에 淸州가 통합당한 원한을 품을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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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충주목
근대 이전에는 지역 차별이 일상이었다. 관내에서 안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얼마 후 복귀시키기를 반복한 이조시대 충주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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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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