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369~0474 年代記

왜가 백제와 함께 신라, 7국, 침미다례 그리고 4읍을 공략하여 나눠가진 때부터 고려가 백제의 한성을 차지하기 전까지.
 
0291~0368 年代記
서진의 무제가 죽은 이듬해부터 왜가 삼한에 진출하기 전까지로, 중국의 기록에 거의 잡히지 않는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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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 ~ 0474 倭의 韓國개입
0369 ~ 0474 倭의 韓國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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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3 日本書紀(720)
왜의 군사가 반도로 건너와 백제의 군사와 함께 동부에 있는 신라를 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7국을 복속시킨 뒤, 다시 서부로 돌아 忱彌多禮 및 比利·辟中·布彌支·半古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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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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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三國史記(1145) 高句麗
前秦의 왕맹이 前燕을 정벌하여 이를 무너뜨렸다. 前燕의 태부 慕容評이 도망해오자 고국원왕이 잡아서 前秦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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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前燕 멸망
요서 일대에 살던 慕容선비는 307년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였다. 그의 아들 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341년에는 용성에 도읍하였으나 353년에는 鄴으로 옮겼다. 370년 前秦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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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02 日本書紀(720)
황전별 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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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05 日本書紀(720)
千熊長彦과 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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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10 ❰❰ 0070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침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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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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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 日本書紀(720)
이 해 千熊長彦을 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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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03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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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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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1.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서거하였다. 고국의 들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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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1 진서(648)
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백제와 임읍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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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6 三國史記(1145) 고려
秦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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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6 진서(648)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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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09 日本書紀(720)
구저 등이 천웅장언을 따라와서 칠지도 1자루와 칠자경 1개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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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3.02 三國史記(1145) 百濟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禿山城主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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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4.08 ❰❰ 0074 三國誤記 新羅
백제가 변경을 침공하니 군대를 보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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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 肖古→貴須
❶ 日本書紀(720) 0255 백제 肖古왕이 죽었다. 0256 백제왕자 貴須가 왕이 되었다. ❷ 三國史記(1145) 0375 近肖古왕이 죽었다. 近仇首왕(이름은 湏다)은 近肖古왕의 아들인데 近肖古왕이 재위 30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1908#10329 SHARED
 
0375.07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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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11 三國史記(1145) 百濟
古記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書記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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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6.09 ❰❰ 0076 三國誤記
(신라) 군대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고 와산성을 다시 회복했다. 백제로부터 와서 머물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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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6.11 三國史記(1145)
(고려)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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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7.10 三國史記(1145)
(고려)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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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7.11 三國史記(1145)
(고려)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고, 사신을 부진(符秦)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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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8.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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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9.03 三國史記(1145) 百濟
사신을 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그 사신이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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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1 三國史記(1145)
위두(衛頭)를 보내 부씨(苻氏)의 진(前秦)에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답해 말했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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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 0262 日本書紀(720)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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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太平御覽(977~983)
진서에 이르기를 382년에 신라국왕 누한이 사신 위두를 파견하여 미녀를 바쳤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는데 머리를 아름답게 늘어뜨린 사람이 많다. 길이는 한 장이나 된다. 부견이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하고 명칭이 바뀌었으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908#30057 SHARED
 
0384 後燕 건국
前燕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前秦의 苻堅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384년 정월에 모용수는 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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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4 貴須→枕流
❶ 日本書紀(720) 0264 백제국 貴須왕이 죽었다. 왕자 枕流왕이 즉위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84 近仇首왕이 죽었다. 枕流왕은 近仇首왕의 맏아들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1908#10349 SHARED
 
0384.04 三國史記(1145)
7월에 사신을 진(晉)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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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 枕流→辰斯
❶ 日本書紀(720) 0265 백제 枕流왕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85 枕流왕이 죽었다. 辰斯왕은 近仇首왕의 둘째 아들이요 枕流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枕流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辰斯가 왕위에 올랐다.
1908#10350 SHARED
 
0385.01 ❰❰ 0085 三國誤記
(신라) 백제가 변경을 침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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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06 三國史記(1145)
(고려) 왕이 병력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가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아군이 이를 쳐서 패배시키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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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11 三國史記(1145)
연(燕)의 모용농(慕容農)이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처음에 유주와 기주의 유민이 많이 투항해오므로 모용농이 범양 사람 방연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어루만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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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 魏(北魏) 건국
탁발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전진에게 멸망당했다.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 후의 道武帝)는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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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은 군대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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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387.09 三國史記(1145) 百濟
말갈과 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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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9.09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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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0.09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쳐서 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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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4 三國史記(1145) 百濟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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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5 三國史記(1145) 高句麗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고국양왕이라 하였다.┆광개토왕은 이름이 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책립되었고 9년에 왕이 서거하여 태자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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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7 三國史記(1145) 高句麗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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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백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또 본국이 빼앗겼던 백성 1만 명을 불러서 타일러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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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10 三國史記(1145) 高句麗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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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412 廣開土王
1908#7966 SHARED COMMENT
 
0392 辰斯→阿花
❶ 日本書紀(720) 0272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紀角宿禰는 백제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❷ 三國史記(1145) 0392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阿莘王이 왕위를 이었다.
1908#7490 SHARED
 
0392 廣開土王陵碑(414)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을 격파하자 □□ 신라는 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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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01 三國史記(1145)
九年春遣使新羅修好新羅王遣姪實聖為質 9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사이좋게 지내니 신라 왕이 조카 실성을 보내서 인질로 삼았다.┆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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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08 三國史記(1145) 高句麗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해 왔으므로,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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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5 三國史記(1145) 新羅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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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7 三國史記(1145) 高句麗
백제가 침략해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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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3.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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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4.07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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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4.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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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5.08 三國史記(1145) 新羅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군사를 내어 그들을 실직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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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5.11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한 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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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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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09 日本書紀(720)
고려인·백제인·임나인·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 그 때 무내숙니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한인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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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7 볼모 直支(腆支)
❶ 일본서기(720) 277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백제의 침미다례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왜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❷ 삼국사기(1145) 397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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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8.08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곧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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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광개토왕릉비(414)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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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01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사신을 燕에 들어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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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양서(636)
구려왕 안(安)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의 2국왕에 봉하였다.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사마·참군의 관직을 설치하였고, 후에는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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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9? 진서(648)
고구려왕 안(安)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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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廣開土王陵碑(414)
十年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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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01 자치통감(1084)
고구려왕 안(安)이 연(燕)을 섬기는데 태도가 오만하였다. 2월에 연(燕)왕 성(盛)이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표기대장군 희(熙)로 선봉을 삼아 신성과 남소 두 성을 빼앗고 5천여 호를 옮기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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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07 三國史記(1145)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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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微叱
○ 일본서기(720)에는 신공황후 원년(320년)에 신라왕 파사매금이 미질기지파진간기를 왜에 인질로 바쳤다고 되어 있다. ○ 삼국사기(1145)에는 실성왕 원년(402년)에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1)에는 나물왕 36년(391년) 庚寅年(390년)에 왕의 셋째 아들 미해를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한국에 진출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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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02 三國史記(1145)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이 죽고 그 아들이 어려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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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05 三國史記(1145)
(백제)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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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05(<-401) 三國史記(1145)
(고려) 왕이 병력을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연(燕)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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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283) 日本書紀(720)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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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02 三國史記(1145)
(백제)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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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02(283)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이라고 하는데, 이가 오늘날 내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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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07 三國史記(1145)
(백제)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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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 廣開土王陵碑(414)
十四年 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 王躬率□□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連船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왜군은 바닷길로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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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08(<-284)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아직기는 또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인 토도치랑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은 아직기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의 조상인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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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12(<-403) 三國史記(1145)
(고려) 군대를 내어 연(燕)을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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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_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
3세기말에 잦았던 왜의 신라침략은 300년 양국이 사신을 교환한 이후 거의 사라졌다. 신라와 백제도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366년 처음 외교관계를 튼 백제와 왜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신라, 백제 그리고 왜 사이의 관계는 391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고려는 중국의 정세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316년 진나라(西晉)가 망했는데, 이미 311년 흉노족이 수도 뤄양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이는 등 그 이전부터 중원을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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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直支(腆支) 귀국
❶ 일본서기(720) 285 백제의 아화왕이 죽자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본국으로 돌아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며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❷ 삼국사기(1145) 405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전지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백제 사람들이 혈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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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1(<-404) 三國史記(1145)
(고려) 연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해왔다.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모용희가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짐이 황후와 더불어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 방비를 엄히 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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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2(<-285) 日本書紀(720)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여러 전적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은 서수 등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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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2_ 고사기(712)
又科賜百濟國「若有賢人者、貢上。」故受命以貢上人・名和邇吉師、卽論語十卷・千字文一卷幷十一卷、付是人卽貢進。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천황은 또 백제국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그 명을 받아 보낸 사람의 이름이 화이길사라 하였다. 논어 열 권과 천자문 한 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부쳐 보내왔다.【이 화이길사가 문수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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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2_ 속일본기(797)
最弟等言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轉至百濟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徴召文人 久素王即以狗孫王仁貢焉 是文 武生等之祖也 於是最弟及眞象等八人賜姓宿祢 최제 등이 말하기를,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 때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문인을 불러, 구소왕은 곧 구(狗)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문(文), 무생 등의 시조이다. 이에 최제 및 진상 등 8인에게 숙니(宿祢)의 성(姓)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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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4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의 군사들이 와서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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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8(<-285) 日本書紀(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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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12 三國史記(1145)
(고려) 연왕 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後燕)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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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522)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천리마와 생웅피, 장니를 바치니, (남연의) 모용초가 몹시 기뻐하면서 물소와 앵무새로 보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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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02 三國史記(1145)
(백제)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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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 燕(後燕) 멸망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고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또한 402년, 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를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이에 모용희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무리한 작전으로 희생만 컸을 뿐 모두 실패하였다. 407년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慕容雲 : 고운高雲)이 옹립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北燕)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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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3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연(北燕)에 보내 종족의 정을 베풀자 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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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3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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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6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1백 명을 노략질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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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0436 연(北燕)
0407~0436 연(北燕)
후연 황제의 양자였던 고운은 반란을 일으켜 마지막 황제 모용희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살해되었는데 그러자 고운의 동지였던 풍발이 난을 수습하고 왕위에 올랐다. 풍발이 죽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풍발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북위의 침공을 받고 고려로 망명하였다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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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덕흥리 고분
節 東夷校尉 幽州刺史 鎭 年七十七薨焉以永楽十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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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522)
고구려가 다시 (남연에) 사신을 보내 천리인 열 명과 천리마 한 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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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02 三國史記(1145)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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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9 三國史記(1145)
(백제)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니 왕이 후한 예로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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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291) 해사록(연대기) 응신천황 22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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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03 三國史記(1145)
十一年以奈勿王子卜好質於髙句麗 11년 나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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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10 ❰❰ 0413 三國誤記
二十二年冬十月王薨號爲廣開土王 겨울 10월에 왕이 서거하니 이름을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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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10 ❰❰ 0413 三國誤記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體貌魁傑志氣豪邁開土王十八年立爲太子二十二年王薨即位 장수왕은 이름이 거련이다. 연이라고도 한다. 광개토왕의 원자이다.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책립하여 태자를 삼았고 22년에 왕이 서거하여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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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梁書(636)
진나라 안제때 왜왕 贊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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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0488 송서
고구려왕 고연(장수왕)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東晋의)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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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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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08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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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송서(488)
(동진이) 백제왕 여영(전지왕)을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고조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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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05 三國史記(1145)
(신라) 눌지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나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삼았으므로,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 했다. 눌지가 이를 원망해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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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09(297) 日本書紀(720)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고려왕은 일본국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는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려의 사신을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여 파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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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三國史記(1145)
(백제) 여름에 사신을 왜국에 파견하여 흰 면포 열 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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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毛末
○ 일본서기(720)에는 신공황후 5년(325년)에 신라가 모마리질지를 보내어 미질허지벌한을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 삼국사기(1145)에는 눌지왕 2년(418년)에 모말이 왜로 가 미사흔을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1)에는 눌지왕 10년(426년) 乙丑年(425년)에 제상이 왜로 가 미해를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 복호는 장수왕이 즉위한 후 외교 관계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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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01 三國史記(1145)
(신라)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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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01_ 三國史記(1145)
(신라) 마침내 사신의 예로써 고구려에 들어갔다.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대왕께서 호의로써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와 같아서 잃을 것이 없으며,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다고 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승락한다.”라고 말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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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진(東晉)-송(劉宋) 왕조교체
궁중 음모로 세력이 약화된 동진에서는 무장들의 정변 기회가 무르익었다. 처음으로 제위를 찬탈한 것은 환현(桓玄)이었는데, 그는 북조 왕조들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은 유유(劉裕)에게 타도되었다. 유유는 황제를 죽이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이고 끝내 스스로 제위에 올라 송(宋:南宋 또는 劉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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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294) 日本書紀(720)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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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3 三國史記(1145)
전지왕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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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3 三國史記(1145)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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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08(300) 日本書紀(720)
신라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을 책망하였다. 신라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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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宋書(488)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왜의 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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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송서(488)
영(映 전지왕)이 장사 장위를 파견하여 조정(劉宋)에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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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02 三國史記(1145)
(고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후하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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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宋書(488)
讚이 또 사마 조달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특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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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보내 위(北魏)에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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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02(306) 日本書紀(720)
고려에 도착하였으나 오(吳, 중국 남조의 송나라로 추정됨)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에 구하니, 고려왕은 구례파와 구례지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나라의 왕은 공녀(工女) 4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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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三國史記(1145)
(고려)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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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三國史記(1145)
(백제)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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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02(<-308) 日本書紀(720)
백제의 직지왕이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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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三國史記(1145)
(백제) 가을에 사신을 송(劉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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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宋書(488)
이달에 왜국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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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송서(488)
백제왕 여비가 다시 공물을 바치므로 여영의 작호를 이어 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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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1.04 三國史記(1145)
(신라) 왜병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명활성을 포위하였는데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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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3.07 三國史記(1145)
(백제)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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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4.02 三國史記(1145)
(백제)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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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4.09 三國史記(1145)
(백제) 다시 흰 매를 (신라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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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4.10 三國史記(1145)
(백제) 신라에서 좋은 금과 명주를 답례로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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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5~0472 北魏 고려 百濟
고려건국설화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최초로 나타난다. 문헌으로는 위서(554)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는 435년부터 북위를 방문하기 시작한 고려 사신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출자에 대해서는 472년에 북위에 보낸 백제의 표문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중국에서는 부여와 백제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1908#5493 SHARED
 
0436 연(北燕) 패망
북위의 거듭된 침공을 받아 위기에 처한 북연의 풍홍은 435년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유사시 고려로 망명할 수 있기를 요청하였다. 436년 마침내 북위가 토벌을 공표하고 북연을 침공하자 고려는 풍홍을 맞이한다며 북연의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군사를 딸려보내 북연의 도읍을 약탈하였다. 장수왕은 또 망명해온 풍홍을 모욕하며 심양으로 보냈다. 그러자 풍홍은 유송에 도움을 청했다. 북위에 이어 유송도 고려에 풍홍을 보내라는 요구를 시작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죽였다.
1908#4983 SHARED
 
0437.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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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 宋書(488)
왜국왕 珍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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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 宋書(488)
이해에 무도왕, 하남국, 고려국, 왜국, 부남국, 임읍국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16408 SHARED
 
0438 宋書(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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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9 송서(488)
거련(장수왕)이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 태조가 북(北 북위)를 토벌하고자 거련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를 내리자, 거련이 말 8백필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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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9.11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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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9.1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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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0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남쪽 변경에 칩입하여 백성을 붙잡아 갔다. 여름 6월에 또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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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0.06 三國史記(1145)
(신라) 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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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0.10 三國史記(1145)
(백제) 사신을 송(劉宋)에 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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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3 宋書(488)
이 해에 하서국, 고려국, 백제국, 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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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3 宋書(488)
왜국왕 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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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3(<-323) 日本書紀(720)
대답하기를, “신은 모릅니다. 신의 아우 오자롱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오자롱은 한국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초요존은 어우숙니에게, “네가 직접 한국에 가서 오자롱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담로의 해인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어우숙니는 한국에 가서 즉시 오자롱을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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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04 三國史記(1145)
(신라) 왜(倭)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왕이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뒤쫓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져서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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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07(<-324) 日本書紀(720)
고려국이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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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4.08(<-324) 日本書紀(720)
고려에서 온 사신들에게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날에 군신 및 백관들을 모아놓고 고려에서 바친 철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적신의 조상인 순인숙니만이 철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고려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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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後漢書(范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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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後漢書)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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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9.09(<-329) 日本書紀(720)
적신의 조상인 지전숙니와 소백수조의 조상인 현유신을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신라인은 두려워하며 공물을 바쳤다. 공물은 비단 1,460필 및 여러 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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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9? 中原高麗碑
高麗大王이란 표현은 스스로를 고려라 불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新羅土內幢主란 표현은 건립 시기에 고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던 실정을 알려주며, 신라를 東夷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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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 송서(488)
(백제의) 여비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여 역림·식점 및 요노를 요구하자 태조는 모두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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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07 三國史記(1145)
(신라)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何瑟羅)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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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宋書(488)
안동장군 왜왕 濟를 안동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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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송서(488)
秋七月甲辰安東將軍倭王倭濟進號安東大將軍 (원가 28년) 가을 7월 갑진, 안동장군 왜왕 제(濟)를 안동대장군으로 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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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宋書(488)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軍과 君을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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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4.08 三國史記(1145)
(신라)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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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송(劉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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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09 三國史記(1145)
(백제)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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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5.10 三國史記(1145)
(신라)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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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8.07 日本書紀(720)
백제의 지진원은 천황이 장차 동침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석천순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내목부를 시켜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에는 “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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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9.04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병선 100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을 에워싸고는 사방에서 화살과 돌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왕성을 굳게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였다.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쳐부수고 북쪽으로 바다 어구까지 뒤쫓아갔다.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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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0 宋書(488)
왜국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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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4 日本書紀(720)
백제 개로왕은 지진원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로 삼았다. ...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군군(곤지)에게 “네가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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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07 日本書紀(720)
(왜) 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 백제신찬에 “신축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보내어 대왜(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 형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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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宋書(488)
왜국 왕세자 興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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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 宋書(488)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조하여 "왜왕의 세자 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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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03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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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2.05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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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三國史記(1145)
(고려) 송(劉宋) 세조 효무황제가 왕을 책립하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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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 日本書紀(720)
(왜)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吉備海部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고 하였다. ... 이에 제군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로 변하여 홀연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군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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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3.02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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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02 日本書紀(720)
신라왕은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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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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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5.03 日本書紀(720)
기소궁숙니·소아한자숙니·대반담련·소록화숙니 등에게 칙명으로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 고려의 조공을 막고 백제의 성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 그대들 네 경을 대장으로 삼으니 왕사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대장군 기소궁숙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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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6 三國史記(1145)
(고려) 위(北魏)의 문명태후가 현조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 진(眞), 상서 이부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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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7.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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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7.07 日本書紀(720)
백제국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귀신이라고 하였다. 또 귀신은 오(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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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8 三國史記(1145)
(신라)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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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9.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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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0 三國史記(1145)
삼년산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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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0 삼년산성
0470 삼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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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0.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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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百濟 개로왕 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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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07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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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3.02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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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3.08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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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4 三國史記(1145)
(백제)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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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4.03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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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4.07 三國史記(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을 송(劉宋)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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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0561 年代記
고려가 백제의 한성을 차지한 때부터 신라가 임나를 병합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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