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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660 ~ 0676 ❻ 新羅의 半島 統ー |
중국에서 다시 통일 왕조인 唐이 들어서자 新羅와 함께 百濟와 高麗를 차례로 무너뜨린 뒤 나눠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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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_ 三國史記 百濟본기
의자왕은 마침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2636#4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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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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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三國史記(1145)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이 겨우 백강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2636#26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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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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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2636#4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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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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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의자왕은 왜 망했을까?
의자왕의 실정을 말할 때 흔히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언급한다.
656-03 삼국사기(1145) 백제본기 의자왕 16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 ...
2636#2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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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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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_ 삼국유사(1281)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2636#3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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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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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23 日本書紀(720)
661년 정월 25일에 돌아와 월주에 도착했다. 4월 1일에 월주로부터 길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왔다. 7일에 행렬이 정안산 남쪽에 도착했다. 8일 닭이 울 무렵에 서남풍을 타고 대해로 배를 몰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 표류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 섬에 도착했을 때 바로 섬사람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게 했다. 5월 23일에 조창의 조정에 바치니,
2636#39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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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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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2 신당서(1060)
시어사 가언충이 군사작전관계로 돌아왔다. 고종이 군대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且高麗祕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고려의 비기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고씨가 한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세적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668년으로부터 9백년 전은 기원전 233년이다.
2636#1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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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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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1 三國史記(1145)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았고, 각간 김인문과 흠순 천존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았으며,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았다.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고,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
2636#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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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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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2636#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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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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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三國史記(1145)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2636#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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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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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
2636#3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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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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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9 三國史記(1145)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 낭장 겸이대후 ,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죄를 빌었다.
2636#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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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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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01 三國史記(1145)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唐)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2636#4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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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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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三國史記(1145)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2636#4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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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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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신당서(1060)
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2636#4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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