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망할 때부터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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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3 三國史記 新羅본기
당나라의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하였다.
3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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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 三國史記 新羅본기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
3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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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_ 三國史記 百濟본기
의자왕은 마침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40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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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三國史記(1145)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이 겨우 백강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26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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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日本書紀(720)
어떤 책에는 ‘660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과 왕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는 병사들을 서북 경계에 진을 치게 하였다. 성책을 수리하고 산천을 나누어 막을 징조였다’고 하였다.
39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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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4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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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의자왕은 왜 망했을까?
의자왕의 실정을 말할 때 흔히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언급한다.
656-03 삼국사기(1145) 백제본기 의자왕 16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 ...
2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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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02 三國史記(1145)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3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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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_ 삼국유사(1281)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35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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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23 日本書紀(720)
661년 정월 25일에 돌아와 월주에 도착했다. 4월 1일에 월주로부터 길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왔다. 7일에 행렬이 정안산 남쪽에 도착했다. 8일 닭이 울 무렵에 서남풍을 타고 대해로 배를 몰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 표류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 섬에 도착했을 때 바로 섬사람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게 했다. 5월 23일에 조창의 조정에 바치니,
39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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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12 三國史記(1145)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 사람인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높은 신하인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 집 등을 주고 서울 및 주(州), 부(府)에 두었으며, 여덟 개의 성은 상태가 완전하였으므로 모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4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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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10.02 三國史記(1145)
영공(英公)이 평양성(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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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2 신당서(1060)
시어사 가언충이 군사작전관계로 돌아왔다. 고종이 군대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且高麗祕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고려의 비기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고씨가 한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세적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668년으로부터 9백년 전은 기원전 23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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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12 三國史記(1145)
요동도안무부대사 요동행군부대총관 겸 웅진도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 태자좌중호 상주국 낙성현개국남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숙위인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에게 성대한 예식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은 약속을 마치고는 천강으로 향하였다.
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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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1 三國史記(1145)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았고, 각간 김인문과 흠순 천존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았으며,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았다.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고,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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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2 三國史記(1145)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고, 인문(仁問) 천존(天存) 도유(都儒) 등은 일선주(一善州) 등 일곱 곳의 군과 한성주(漢城州)의 군사와 말을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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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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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수임성 사람인 대형 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을 보고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에 머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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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三國史記(1145)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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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당(唐)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에게 편지를 맡겨 보냈다. "... 고장군의 중국인 기병과 이근행의 변방 군사, 오(吳) · 초(楚) 지방의 수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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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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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8 三國史記(1145)
(당이)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산세, 아찬 능신, 두선, 일길찬 안나함, 양신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4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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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9 三國史記(1145)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 낭장 겸이대후 ,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죄를 빌었다.
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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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 신당서(1060)
고려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종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경사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좌진군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
4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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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01 三國史記(1145)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唐)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4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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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三國史記(1145)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4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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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신당서(1060)
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4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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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 三國史記(1145)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 1천 필도 얻었다.
4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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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678 신당서(1060)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무후 때 또 그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4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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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 구당서(945)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4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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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02 구당서(945)
공부상서 고장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안동부로 돌아가 고려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주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하고 백제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옮겨가자 거기에 통합하였다.
工部尚書高藏授遼東都督,封朝鮮郡王,遣歸安東府,安輯高麗餘眾;司農卿扶余隆熊津州都督,封帶方郡王,令往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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