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660~0676 年代記

백제가 망할 때부터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길 때까지.
 
0562~0659 年代記
신라가 임나를 병합한 때부터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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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 ~ 0676 韓國統一의 완성
0660 ~ 0676 韓國統一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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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3 三國史記 新羅본기
당나라의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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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5 日本書紀(720)
이 달 …… 또 온 나라 백성들이 까닭없이 무기를 들고 길을 왔다갔다 했다. 國老가 “백제국이 땅을 잃을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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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5.26 三國史記 新羅본기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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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18 三國史記 新羅본기
남천정에 다다랐다. 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서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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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 三國史記 新羅본기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의자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과 흠춘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에 가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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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_ 三國史記 百濟본기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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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21_ 三國史記 열전 김유신
무열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군사들을 싣고 그들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나는 바닷길로 가고 태자는 육지길로 가서 7월 10일 백제의 왕도인 사비의 성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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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 日本書紀(720)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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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09 웅진구, 황산벌
0660.06 계백 열전0660.07.09 三國史記 新羅본기0660.07.09_ 구당서(945)0660.07.09_ 신당서(1060)0660.07.09_ 신당서(1060)0660.07.09_ 三國史記 百濟본기0660.07.09_ 三國史記 百濟본기0660.07.09_ 三國史記 열전 김유신
 
0660.07.10_ 三國史記 新羅본기
삼군이 보고 분에 받쳐서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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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三國史記 百濟본기
我軍大敗王師乗潮舳艫銜尾進鼓而譟定方將歩騎直趍眞都城一舎止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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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三國史記 百濟본기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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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0_ 구당서(945)
遇潮且上 連舳入江 定方於岸上擁陣 水陸齊進 飛楫鼓噪 直趣真都 去城二十許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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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1_ 三國史記 新羅본기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인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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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1_ 三國史記 新羅본기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서 당나라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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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 三國史記 新羅본기
12일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들이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기 위하여 소부리 벌판으로 나갔다.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서 두 나라의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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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_ 三國史記 新羅본기
백제의 왕자가 또 상좌평을 시켜서 제사에 쓸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고,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여섯 명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그것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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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2_ 三國史記 百濟본기
우리(백제)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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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 三國史記 新羅본기
13일에 의자가 좌우의 측근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의 아들인 융이 대좌평 천복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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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3_ 三國史記 百濟본기
의자왕은 마침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주기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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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8 三國史記 新羅본기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 방령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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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18_ 三國史記 百濟본기
이때 의자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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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29 三國史記(1145)
왕이 의자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 천복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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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구당서(945)
定方自城山濟海,至熊津江口,賊屯兵據江。定方升東岸,乘山而陣,與之大戰,揚帆蓋海,相續而至。賊師敗績,死者數千人,自餘奔散。遇潮且上,連舳入江,定方於岸上擁陣,水陸齊進,飛楫鼓噪,直趣真都。去城二十許裏,賊傾國來拒,大戰破之,殺虜萬餘人,追奔入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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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당서(1060)
自城山濟海至熊津口,賊瀕江屯兵,定方出左涯,乘山而陣,與之戰,賊敗,死者數千。王師乘潮而上,舳艫銜尾進,鼓而噪,定方將步騎夾引,直趨真都城。賊傾國來,酣戰,破之,殺虜萬人,乘勝入其郛,王義慈及太子隆北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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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당서(1060)
自城山濟海。百濟守熊津口,定方縱擊,虜大敗。王師乘潮帆以進,趨真都城一舍止。虜悉衆拒,復破之,斬首萬餘級,拔其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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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三國史記(1145)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이 겨우 백강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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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日本書紀(720)
어떤 책에는 ‘660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과 왕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는 병사들을 서북 경계에 진을 치게 하였다. 성책을 수리하고 산천을 나누어 막을 징조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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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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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논하여 말하다 - 김부식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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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당(唐)-新羅와 百濟의 전쟁 과정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본 당(唐)-신라와 백제의 전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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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7_ 의자왕은 왜 망했을까?
의자왕의 실정을 말할 때 흔히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언급한다. 656-03 삼국사기(1145) 백제본기 의자왕 16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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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8.02 三國史記(1145)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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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三國史記(1145)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여 군주 필부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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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24 日本書紀(720)
고려의 사신 을상 하취문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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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_ 삼국유사(1281)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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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0663 百濟 재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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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년경의 세계 지도
0660년경의 세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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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5.23 日本書紀(720)
661년 정월 25일에 돌아와 월주에 도착했다. 4월 1일에 월주로부터 길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왔다. 7일에 행렬이 정안산 남쪽에 도착했다. 8일 닭이 울 무렵에 서남풍을 타고 대해로 배를 몰았다. 바다에서 길을 잃어 표류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8박 9일만에 겨우 탐라 섬에 도착했을 때 바로 섬사람 왕자 아파기 등 9명을 불러 위로하고, 함께 객선에 태워 천황의 조정에 바치게 했다. 5월 23일에 조창의 조정에 바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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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 三國史記(1145)
연개소문은 666년에 죽었다. (천남생 묘지명에 의거하여 665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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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04 三國史記(1145)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은 모두 나마의 관등으로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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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04 三國史記(1145)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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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6.12 三國史記(1145)
당나라는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 사람인 학처준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높은 신하인 연정토가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연정토와 부하 24명에게 의복과 식량, 집 등을 주고 서울 및 주(州), 부(府)에 두었으며, 여덟 개의 성은 상태가 완전하였으므로 모두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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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07 三國史記(1145)
당나라 황제가 칙명을 내려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싸움에 나아가게 하였다. 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한 황제가 칙명을 내려 대아찬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았는데, 왕은 왕궁의 뜰에서 칙명을 받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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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07 三國史記(1145)
고종이 유인원(劉仁願)과 김인태(金仁泰)에게 비열도(卑列道)를 따르도록 하고, 또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서 평양에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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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08 三國史記(1145)
왕이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 등 30명의 장군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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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09 三國史記(1145)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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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10.02 三國史記(1145)
영공(英公)이 평양성(平壤城)의 북쪽으로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大奈麻)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면서 거란(契丹) 기병(騎兵)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漢城)에 이르러 편지를 전하여 군사 동원 시기를 독려하니 대왕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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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7.11.11 三國史記(1145)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영공(英公)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도 또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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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三國史記(1145)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와 함께 정토(淨土)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게 하였다. 정토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만 돌아왔다. 그 뒤로는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칙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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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三國史記(1145)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이에 파진찬(波珍湌)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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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2 신당서(1060)
시어사 가언충이 군사작전관계로 돌아왔다. 고종이 군대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且高麗祕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고려의 비기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고씨가 한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세적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668년으로부터 9백년 전은 기원전 23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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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12 三國史記(1145)
요동도안무부대사 요동행군부대총관 겸 웅진도안무대사 행군총관 우상 검교 태자좌중호 상주국 낙성현개국남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숙위인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에게 성대한 예식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은 약속을 마치고는 천강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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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1 三國史記(1145)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았고, 각간 김인문과 흠순 천존 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았으며,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았다.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고, 잡찬 숭신,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파진찬 선광,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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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2 三國史記(1145)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大谷)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고, 인문(仁問) 천존(天存) 도유(都儒) 등은 일선주(一善州) 등 일곱 곳의 군과 한성주(漢城州)의 군사와 말을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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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7 三國史記(1145)
왕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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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6.29 三國史記(1145)
여러 도(道)의 총관들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병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도록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서 영류산(서경 북쪽 20리 되는 곳) 아래에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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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7.16 三國史記(1145)
왕이 한성주에 이르러서 여러 총관들에게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였다. 문영 등이 사천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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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갔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흥원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에 이르러 힐차양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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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10.22 三國史記(1145)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과 장군 등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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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11.05 三國史記(1145)
왕이 포로로 잡힌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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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
KBS역사스페셜 – 고구려 남부전선 최후의 증언, 임진강 철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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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9.05 三國史記(1145)
급찬 기진산 등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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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1 三國史記(1145)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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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3 三國史記(1145)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렀는데, △△△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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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4.04 三國史記(1145)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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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수임성 사람인 대형 모잠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을 보고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에 머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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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三國史記(1145)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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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三國史記(1145)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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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12 三國史記(1145)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얻고 마침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를 보내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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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三國史記(1145)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들어가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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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三國史記(1145)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장차 물러가려고 할 때 군사를 내어 쳐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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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1 三國史記(1145)
당(唐)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 등을 보내 병사로 옹포를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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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6 三國史記(1145)
장군 죽지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서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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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6 三國史記(1145)
마침내 당(唐)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 나라의 과의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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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당(唐)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에게 편지를 맡겨 보냈다. "... 고장군의 중국인 기병과 이근행의 변방 군사, 오(吳) · 초(楚) 지방의 수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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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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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07.26 三國史記(1145)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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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1.10.06 三國史記(1145)
당(唐) 조운선 70여 척을 쳐서 낭장 겸이대후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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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1 三國史記(1145)
왕이 장수를 보내서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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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2 三國史記(1145)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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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7 三國史記(1145)
당(唐)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한 번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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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8 三國史記(1145)
(당이)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산세, 아찬 능신, 두선, 일길찬 안나함, 양신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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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8 三國史記(1145)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4,360보(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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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9 三國史記(1145)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 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 낭장 겸이대후 ,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죄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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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09 三國史記(1145)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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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09 三國史記(1145)
당(唐) 군사가 말갈과 거란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의 목을 베었고, 당(唐)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가히 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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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3_ 三國史記(1145)
일찍이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없앴다가 이 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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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 신당서(1060)
고려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종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경사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좌진군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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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4.01 三國史記(1145)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唐)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나라의 서울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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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三國史記(1145)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임해군공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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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2 신당서(1060)
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그들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노(虜)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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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7 三國史記(1145)
당군이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 거시지가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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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 三國史記(1145)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 1천 필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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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29 三國史記(1145)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도망가게 하고는 전마 30,380필을 얻었으며 남겨놓은 병기도 이처럼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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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三國史記(1145)
사신을 보내 당(唐)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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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三國史記(1145)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위협하고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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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三國史記(1145)
당군이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을 둘러쌓았지만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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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三國史記(1145)
말갈이 또한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서 없애뜨렸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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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0675.09_ 三國史記(1145)
당(唐)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을 둘러싸고 쳐서 빼앗았는데,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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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09_ 三國史記(1145)
또한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을 벌여 모두 이겼는데, 6천 4십 7명의 목을 베었고 말 2백 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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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5.11 三國史記(1145)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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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02 구당서(945)
(上元3년) 移安東都護府於遼東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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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678 신당서(1060)
(부여융을) 대방군왕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무후 때 또 그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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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 구당서(945)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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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7.02 구당서(945)
공부상서 고장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안동부로 돌아가 고려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주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하고 백제의 무리를 안집하게 했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옮겨가자 거기에 통합하였다. 工部尚書高藏授遼東都督,封朝鮮郡王,遣歸安東府,安輯高麗餘眾;司農卿扶余隆熊津州都督,封帶方郡王,令往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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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부여융묘지명
中國 河南省 洛陽. 公은 이름이 隆이고 字도 隆으로, 백제 辰朝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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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 흑치상지묘지명
中國 河南省 洛陽. 府君은 이름이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氏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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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가 新羅에 흡수되는 과정
신라는 당(唐)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바로 이 지역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왜(倭)의 원병을 물리치고 당(唐)의 침공마저 꺾은 뒤에야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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