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백제의 한성을 차지한 때부터 신라가 임나를 병합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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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 蓋鹵王→文周王
❶ 일본서기(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 ❷ 삼국사기(1145) 文周王은 蓋鹵王의 아들이다. 蓋鹵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蓋鹵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文周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1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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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3 日本書紀(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下哆呼唎현의 별읍이다.
26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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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8 宋書(488)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7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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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南齊書(537)
건원 원년에 왜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 임금 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17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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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文斤王→東城王
❶ 일본서기(720) 백제의 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이 되었다. ┆ ❷ 삼국사기(1145) 東城王의 이름은 牟大이니 文周王의 아우 昆支의 아들이다. 三斤王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1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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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0.04 三國史記(1145)
장수왕이 사신 여노 등을 보내 남제와 통교하게 하였다. 위(北魏)의 광주인이 바다 가운데서 여노 등을 잡아 대궐로 보냈다. 위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경이 우리의 경역을 넘어 외교를 하여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이겠는가?”고 하였다.
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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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南齊書(537)
위(北魏)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다.
3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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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1 위서(554)
연(璉 장수왕)이 죽은 나이가 100여세였다. 고조는 동쪽 교외에 나가 거애하고, 알자복야 이안상을 보내 차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 연(璉)의 손자 운(雲 문자왕)을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배하고, 의관과 복장·기물 및 수레·깃발 따위의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4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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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東城王→武寧王
❶ 일본서기(720) 백제 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제거하고 嶋王을 세우니 이가 武寧王이다. ┆
❷ 삼국사기(1145)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東城王이라 하였다. 武寕王의 이름은 斯摩이니 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牟大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4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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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우전팔번 신사 인물화상경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제왕이 의자사가(おしさか)궁에 있을 때 사마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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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507 위서(554)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기를,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에 빠뜨리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珂는 섭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 國의 王인 臣 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모두 저희 나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40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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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2 日本書紀(720)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백제본기에 구라마치지미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 임나의 일본 현읍(日本 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대(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3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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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2 日本書紀(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청했다. ...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3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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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516 己汶
513년에 백제는 가라가 기문을 빼앗았다고 왜에 호소하였다. 왜는 백제의 편을 들어주었고 가라는 반발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일전을 준비하였다. 왜군은 기문으로 침공하다 패하였고 백제의 장수는 신라에서 가라를 공격하였다. 516년에 백제는 기문을 내려준 데 대해 왜에 사례하였다.
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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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12 三國史記(1145)
(백제) 양(梁 502-557)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25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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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530 近江毛野臣
527년에 왜는 근강모야신으로 하여금 6만의 군사를 이끌고 임나에 나아가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축자국조 반정이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529년 왜는 다시 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530년 임나의 사신이 왜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였다. 왜는 목협자를 보내 모야신을 불렀다. 모야신은 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2491#2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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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 日本書紀(720)
임나왕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태중천황이 내관가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임나왕은 가라왕을 뜻한다.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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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0.09 日本書紀(720)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물부대련미여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남대적천황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임나의 상치리(上哆唎)·하치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을 청하였는데, 대반대련금촌이 표에서 청하는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6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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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임나 재건 논의
541년 4월에 임나를 재건하라는 천황의 조서가 백제로 오자 임나의 여러 나라들이 백제에 모여
방안을 논의하였다. 7월에는 백제 성왕이 신라와 화해하려는 임나의 움직임을 듣고 이를 꾸짖었다. 544년 3월에 성왕은 임나에 파견된 몇몇 사람의 소환을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다. 11월에 천황의 조서가 오자 성왕은 다시 임나의 여러 나라를 불러 임나 재건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2491#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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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日本書紀(720)
이 해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狛國의 향강상왕(안원왕)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40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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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9.10 三國史記(1145)
(백제) 왕이 양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 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2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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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0553 百濟와 新羅의 고려 침공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2491#8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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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6.01 日本書紀(720)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재신, 좌백련, 파마직을 보내어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3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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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 日本書紀(720)
이 해 다시 奴氐 大舍를 보내어 지난 번의 調賦를 바쳤다. 難波의 大郡에서 여러 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掌客 額田部連과 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穴門에 이르렀다.
3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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