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12.15ꜛ ◾ 吉州¹ 1451
高麗史(1451)┆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11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海洋(三海陽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90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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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6.13+ 오아속이 曷懶甸에 斜葛을 파견하다.
오아속은 斜葛로 하여금 국경을 바르게 정하도록 하였는데, 斜葛은 乙離骨水를 거쳐 曷懶甸 活禰水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으나, 송사를 잘 판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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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3.04 闢登水에서 패전
윤관이 曷懶甸을 침공하러 갔으나 闢登水에서 石適歡에게 크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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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7.12.15ꜛ ◾ 吉州¹┆弓漢村
起雲嶺을 넘어 浮瑞川을 따라 내려오다 吉州²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초기에 吉州¹를 설치했던 弓漢村이자 훗날의 西之委일 것이다. 왕고는 弓漢里 밖의 산이 연달아 있고 작은 길 하나로만 통행할 수 있어 關城을 쌓아 그 길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弓漢村에 성을 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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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7.12.15ꜛ ◾ 吉州¹┆弓漢村
1101년에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등 55인이 왕고에 입조하였고, 1104년에 오아속이 弓漢村을 토벌했을 때는 왕고에서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오해하였으며, 1108년에 9성을 쌓았을 때는 거란에 '女眞의 弓漢里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우리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弓漢里 추장 중에는 요나라의 벼슬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처럼 弓漢村은 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吉州를 설치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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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06.13+ ◾活涅水(活禰水)
석적환의 至乙離骨嶺益募兵趨活涅水와 사갈의 至乙離骨水曷懶甸活禰水를 보아 乙離骨水를 따라올라가 乙離骨嶺을 넘으면 曷懶甸의 活涅水(活禰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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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ꜛ 英州
蒙羅骨嶺 ➔ 英州 → 參散 → 安北 → 北靑州 → 靑州 → 北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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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ꜛ 吉州¹┆弓漢嶺
弓漢伊村 ➔ 吉州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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