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昌 遂城 碣石山
by Silla on 2021-02-16
ᐥ신창은 전한 시기에 두 곳이었다. 하나는 요동군의 현이고 또 하나는 연의 탁군에 있었다는 지명이다. 수성도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낙랑군에 있던 현이고 또 하나는 전국 시대에 무수였던 곳이 북신성과 신창을 거쳐 수성으로 개명된 곳이다. 갈석은 한 곳 밖에 없으나 기록이 왜곡되어 낙랑군 수성현에도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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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漢書(한서) 後漢書(후한서) 晉書(진서) 魏書(위서) 隋書(수서)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漢(-202~220) 晉(265~316) 魏(386~534) 齊(550~577) 隋(581~618) 唐(61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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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개의 新昌
魏書에는 新昌이 두개 나온다.
요동군에서 기원한 新昌과 북평군에 등장한 新昌이 바로 그것이다.

영주에는 6군 14현이 있다. 창려군(용성,광흥,정황), 건덕군(석성,광도,양무), 요동군(양평,新昌), 낙랑군(영락,대방), 기양군(평강,유성) 영구군(부평,영안).
남영주에는 5군 11현이 있다. 창려군(용성,광흥,정황), 요동군(태평,新昌), 건덕군(석성,광도), 영구군(부평,영안,대방), 낙랑군(영락).
평주에는 2군 5현이 있다. 요서군(비여,양악,해양), 북평군(조선,昌新).

여기서 평주의 昌新은 新昌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隋書에 新昌으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新昌이 병존했다는 것은 隋書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後齊唯留昌黎一郡領永樂新昌二縣餘並省
高齊가 창려군을 남겨 영락, 新昌 두 현을 다스리게 하고 남영주의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다.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노룡은 옛날에 북평군을 설치한 곳이다. 新昌, 조선 2현을 거느렸었다. 高齊가 조선을 新昌에 넣고 또 요서군을 폐지하여 해양현을 비여에 넣어 함께 거느렸다.

요동에서 기원한 新昌은 漢書에 요동군 18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요동군 11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는 요동국 8현의 하나로 나온다.
북평군에 등장한 新昌은 한서에서 연나라 탁군에 北新成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 新昌과 연결지을 수 있다.

燕地尾箕分野也 武王定殷 封召公於燕 其後三十六世與六國俱稱王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 西有上谷代郡雁門 南得涿郡之易容城范陽北新城故安涿縣良鄉新昌 及勃海之安次 皆燕分也 樂浪玄菟亦宜屬焉
燕은 尾星과 箕星의 분야다. 무왕이 殷을 평정하고 소공을 燕에 봉했다. 그후 36세가 지나 다른 6국과 함께 왕을 칭했다. 동부에는 어양, 우북평, 요서 그리고 요동이 있고 서부에는 상곡, 대군 그리고 안문이 있다. 남쪽으로는 탁군의 역, 용성, 범양, 北新城, 고안, 탁현, 양향, 新昌 그리고 발해의 안차까지 모두 燕이다. 낙랑과 현도 또한 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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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漢書(한서) 後漢書(후한서) 晉書(진서) 魏書(위서) 隋書(수서)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漢(-202~220) 晉(265~316) 魏(386~534) 齊(550~577) 隋(581~618) 唐(61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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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개의 遂城
遂城은 漢書에 낙랑군 25현의 하나로 나오고 後漢書에는 낙랑군 18성의 하나로 나오며 晉書에도 낙랑군 6현의 하나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魏書에는 낙랑군 2현에서 빠져 있다.
낙랑에서 기원한 이 遂城은, 그 이후 다시 행정구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첫번째의 遂城이다.
한편, 漢書에는 중산국 14현의 하나로 北新成이 나온다. 이 北新成은 後漢書에서 유주 탁군의 7성 중 하나로 나오고 晉書에서 기주 고양국 4현의 하나로 나온다. 그러나 舊唐書에는 이 北新成이 新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되어있다.

遂城漢北新城縣屬中山國後魏改為新昌隋末為遂城
수성은 漢의 북신성현이다. 중산국에 속했다. 拓跋魏가 신창으로 개명하였고 隋 말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북신성>신창>수성)

拓跋魏가 北新成을 新昌으로 개명한 것은 남영주를 설치한 사실과 연결된다. 이때 설치한 남영주의 요동군에 新昌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北新成에 新昌현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隋 말에 수성으로 개명한 사실은 隋書에 자세히 나온다.

遂城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十八年改為遂城
수성은 옛 무수였다. 拓跋魏가 남영주를 설치하였다...598년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무수>수성)

拓跋魏가 남영주를 설치한 곳은 武遂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武遂는 遂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되어 있어 舊唐書에서 新昌을 遂城으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와 어긋나 보인다.
이 모순은 武遂를 北新成과 동일하게 설정하면 해소된다.
史記에는 기원전 243년에 趙가 燕을 침공하여 武遂와 방성 두 성을 빼앗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武遂가 漢書와 後漢書 그리고 晉書에서 北新成이 되었고 魏書에서 新昌이 되었다가 隋書에 이르러 遂城이 된다는 이야기다.
(무수>북신성>신창>수성)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遂城이 두번째의 遂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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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漢書(한서) 後漢書(후한서) 晉書(진서) 魏書(위서) 隋書(수서)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漢(-202~220) 晉(265~316) 魏(386~534) 齊(550~577) 隋(581~618) 唐(61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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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개의 碣石
사기색은(679~732)에는 태강지리지(280~289)를 인용하여 '낙랑 수성에 있는 碣石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사기(-91)에는 秦이 조선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키고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고만 되어 있다. 秦이 요동 외요에 속했을 낙랑 수성까지 장성을 연장했을 가능성은 낮다.
秦장성을 쌓은 지 400여년 후, 북쪽 오랑캐가 북평을 침략하자 西晉의 당빈이 온성에서 碣石까지 3천리에 걸친 장성을 복구했다. 여기에 나오는 碣石은 당연히 북평의 碣石이다. 그리고 晉書에는 秦장성을 복구하였다고 되어있지만 당빈이 복구한 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1만리에 걸친 秦장성과 큰 차이가 있었다. 당빈의 업적을 치켜세우기 위해 秦장성이란 표현을 썼을 것이다.
한편, 통전(801)에는 '무수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당빈이 온성에서 碣石까지 秦장성을 복구하였다'에 나오는 온성의 자리에 무수성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원래 온성이 아니라 무수성일 가능성도 있다. 무수성에서 갈석까지의 구간이 흉노와 오환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당빈의 직책은 유주제군사였는데 무수성에서 갈석까지의 구간은 유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또 온성에서 장성이 시작되면 도읍인 낙양 인근에서 장성이 끝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지는 점도 있다. 갈석에서 3천리라는 거리는 무수성보다 온성이 더 어울리지만 이 또한 과장된 거리일 수 있다.
어쨌든 이 무수성은 遂城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는데 그 때문에 낙랑 遂城으로 오인되기 쉽게 되었다. '낙랑 수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당빈이 온성에서 碣石까지 秦장성을 복구하였다'와 결합하여 낙랑 수성에 碣石이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碣石도 진장성의 끝이라 하고 낙랑 수성도 진장성의 끝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갈석≠온성=무수성=낙랑수성=갈석이 되는 모순이지만 변형이 누적되는 기록의 전승과정에서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낙랑 수성에 있는 碣石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A '당빈이 온성에서 碣石까지 장성을 복구하였다.'
B '당빈이 온성에서 碣石까지 秦장성을 복구하였다.'
C '무수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
D '낙랑 수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
E '낙랑 수성에 있는 碣石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

A가 B로 부풀려지고 B는 C로 변형되었는데 이 C는 다시 D로 착각되었다. 이 D가 B와 결합해 E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원래 있는 碣石에 낙랑 수성의 碣石이 더해져 碣石이 두 개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좌갈석과 우갈석이라는 설명을 낳았다.
그런데 武遂는 北新成과 新昌을 거쳐 598년에 遂城으로 개명되었으므로 태강지리지(280~289) 이후의 일이다. 태강지리지에 이미 낙랑 수성에서 秦장성이 시작되었다고 나오는 것은 무수성을 낙랑 수성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에 걸림돌이 된다.
태강지리지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여러 사서에 인용된 형태로만 남아 있는데, 사기색은이 태강지리지를 오독했을 수 있다.
사기색은은 무수성이 수성으로 개칭된 이후에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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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漢書(한서) 後漢書(후한서) 晉書(진서) 魏書(위서) 隋書(수서)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漢(-202~220) 晉(265~316) 魏(386~534) 齊(550~577) 隋(581~618) 唐(61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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