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19 진중권
by politician on 2020-02-09
인터넷 논객 진중권 인터뷰
미디어다음/심규진 기자

우리사회에서 ‘진중권’을 알만한 사람들 중에 진중권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니, 처음에는 좋아했다가 이제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다.
이유가 뭘까?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우리 사회에서 유독 ‘튀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중권처럼 많은 ‘적’을 가진 사람을 꼽기도 어렵다. 보수에서 좌파까지, 우리 사회 각계의 모든 정파성과 이데올로기를 향해 싸움을 거는 그의 논쟁 방식은 스스로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 느낌이다. 반면에 진중권의 ‘경쾌한 똥침’에 열광하는 매니아들은 이데올로기의 급소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때려내는 그의 ‘말발’과 냉정한 논리를 사랑한다. 어찌됐든 그가 인터넷 매체가 낳은 대표적인 ‘스타논객’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안티조선’에서 ‘안티오마이’로, 한겨레 기고 거부와 민주노동당 탈당까지 그의 ‘논쟁사’를 따라가다 보면 숨이 가쁠 정도다. 논객으로서 그의 화법은 철저히 ‘비판’에 맞춰져 있다. ‘반대만 할 줄 아는 남자’라는 세간의 이미지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이데올로기 과잉을 대한민국 최고의 병리 현상으로 진단한다”는 ‘낭만자객’ 진중권의 삶과 생각을 잠깐 들여다봤다.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무겁고 심각한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듯 특유의 독설과 유머로 난타하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진지한 표정을 보이며 우리 사회 난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 오마이뉴스, 한겨레 등 진보 진영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요?

● 오마이에 당했죠. 그런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인성이 안 되서 교수가 못된다’고 저를 공격한 글을 탑에 올립니까? 그게 신문이에요? 내가 그토록 비난했던 조선일보는 나한테 글 써달라고 세번을 청탁을 했어요.
보수의 포용력과 여유, 그리고 진보세력의 편협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아무래도 가진 자는 더 여유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요. 그러나 최소한의 룰은 지켜야죠. 한겨레도 웃겨요. 홍세화씨가 민노당 당적을 걸고 편파보도를 한 것도 아닌데 민주당 편향의 왜곡 편파 보도를 일삼던 그들이 왜 홍세화씨한테 뭐라고 하냐는 거에요.

○ 엄연히 한 조직의 내부에는 룰이 존재하는데, 외부인이 간섭하는 걸로 비춰지지 않을까요? 더구나 기자는 중립적이라는 가치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 아니죠. 그런 위헌적인 내규가 어디 있어요? 헌법에 보장된 정치적 자유인데.

○ 그럼 민주노동당은 왜 탈당한 겁니까?

● 그 사람들도 당파성을 가지고 저를 비난하잖아요. 제가 민노당원이긴 하지만 논객의 입장에서 자당(민주당) 후보를 흔드는 ‘후단협’(후보단일화협의회)을 비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노무현을 옹호했다고 절 비난하는 거에요. 난 논객이니까 자유롭게 글을 쓸 권리가 있는 건데.

○ 안티조선과 갈라진 것도 같은 이유죠?

● 안티조선이 민주당의 정치선동대로 변해 버렸으니까요.

○ 한 때의 동지였던 강준만씨와 결별한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 처음엔 같은 '류'라고 오해를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호남 지역주의 선동자였어요.

전방위 파이터 진중권은 잇따른 진보진영과의 불협화음에 대해 답답하다는 입장이었다. 그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보수 진영의 대척점에 놓인 진보 진영이 보수의 정파성을 답습하고 비리와 부정을 잉태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는 태도는 지식인으로서의 냉정함과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편을 가르고 서로에 대한 비판 정신을 상실해 가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진중권식 도발은 조직에 속하지 않은 논객의 특권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용감했고, 그만큼 평가 받을 만 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직’과 ‘정치’라는 인간 사회의 근원적 현상에 대해 그는 너무 옹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정파성이라는 필요악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의’와 ‘선의’에 대해 그는 너무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닐까?

○ 어떤 조직이든 간에 문제는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진중권씨 주장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는 지적도 많았는데요.

● 난 책임을 졌다고 봅니다. 특정 당의 선동대가 되는 것은 논객의 임무가 아니죠. 장기적으로 내 말이 옳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당장은 조선일보를 비판하면 DJ 지지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데, 나의 일은 그게 아니거든요. 안티조선이 잘못 돼가고 있는 것을 일년 전에 경고했죠. 내가 속한 진영에 비판을 하는 게 책임을 지는 자세라고 봅니다. 지나고 보니 저놈 말이 맞는데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도 “기분 나쁜 놈이라는 욕은 먹어도 기준 바꾸고 말바꾸는 놈은 아니라는 신뢰는 생겼다”고 봐요.

○ 일명 ‘노빠’로 불리는 노무현 지지자들과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DJ 지지자들 모두에게 선전포고를 한거나 다름없는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 우리당 보다는 ‘잔민당’(민주당)이 더 나쁘다고 봐요. 명분이 없잖아요. 자기들의 호남패권을 유지하겠다는 것 뿐, 둘이 갈라진 것은 당내 헤게모니 싸움에 불과하지요. 어차피 재벌 돈 갖고 정치하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하나로 합칠 거라고 보는데, 특별히 우리당이 더 나을 것은 없어도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것 하나는 인정해줍니다.

○ 투쟁 세력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신정치, 측근 부패 등의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DJ가 오랜 기간 군부독재와 투쟁했던, 또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겼던 공적은 인정할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을 배반했다는 주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에 대항해 반지역주의를 위해 싸운 호남인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남을 고립시켰다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 민주주의는 DJ가 한 게 아닙니다. 대중이 한 거죠. 대중들이 한 민주주의를 그 사람이 자기 이익 채우겠다고 87년도에 단일화 깨버려서 못한 것 아닙니까? 그 때 제가 DJ에 대한 신뢰를 버렸죠. 그 사람들이 뻔뻔하게 뭘 더 바랍니까? 40년 세월 소통령으로 누렸으면 충분한 거 아니에요? 김대중씨 아직도 정치인들한테 세배 받는다면서요? 박정희의 지역주의에 투쟁했다고 하는데 반대 급부로 과실을 얻은 것도 그들입니다. 대선에서는 손해를 봤지만 총선에서는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됐지 않습니까? 고위직에서 영호남 차별이 없어진 것은 긍정적이에요. 그런데 서민들한테 뭘 해줬냐는 거죠. 권노갑씨 정치자금 비리 봐요. 5년 정권 잡으면서 해먹은 것으로 충분해요. 노무현 같은 사람은 김대중이 아니라도 국회의원 할만한 사람 아닙니까? 김대중한테 빚을 졌다는 것은 김대중이 국회의원을 시켜줬다는 거 밖에 안됩니다. 국민이 국회의원을 뽑는 거지 자기가 뭔데 국회의원 자리를 나눠줍니까?
박통 때 호남 차별을 했다는 것도 그래요. 정책적으로 차별 받은 적이 없어요. 남동지역을 공단으로 키운 것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거였어요. 내가 경제적인 지표들을 뽑아 봤는데, 영호남인의 1인당 총생산에 아무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제일 낮은 게 경북이에요. DJ 이전에는 지역 감정이 없었습니다. 87년 후보 단일화가 깨지기 전까지는 영호남 대립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대구, 경북에 맞서 호남과 경남이 연대하는 모양새였지.

○ 그럼 박통 때부터 경제적 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선동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 과장이 있다는 거죠. 도시 농촌 간 차별이었을 뿐이라고 봐요. 그런데 전라도는 농업지대잖아요. 전라도의 농민들이 경상도의 도시나 서울로 간 거고, 그런데 경상도 농민은 경상도 도시로 갔을 뿐이에요. 대한민국은 넓은 땅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평준화될 수 밖에 없어요.

○ 정치인들은 그렇다 치죠. 그런데 호남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호남 사람들은 ‘반지역주의’를 구현할 인물로 김대중을 선택했고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을 찍은 것 아닐까요? 노무현이 영남 출신이고 동교동계 주류가 아닌데도 오랫동안 지역주의와 맞서 싸웠으니까, 호남지역주의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영남 보수세력의 지역주의에 기댄 이회창을 응징하기 위해서 노무현을 선택한 것 아닐까요?

(거침없이 이어지던 그의 논박이 이 대목에서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뭔가 당혹스러운 듯 목소리는 더욱 격앙됐다.)
● 자꾸 김대중, 김대중하니까 피곤하거든요. DJ가 해준 게 뭐라고? 이해가 안가요. 1930년대 멘탈리티죠. 엘리트 층에서는 영호남 균형이 잡혔다지만, 호남 주민들한테 도대체 무엇을 해줬냐는 겁니다.

‘호남인의 선택’에 대한 고민에서는 비껴선 채, 서민들을 위한 실질적인 ‘변화’와 ‘개혁’이 없다는 지적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DJ의 ‘지역주의’에 비해 ‘반지역주의’를 추구한 노무현도 그에게는 개혁성의 측면에서 이회창과 다를 것이 없었다. 기득권을 위한 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기하는 비판의 끈을 따라가다 보면 권력에 대한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민노당의 정파성을 거부하며 탈당은 했지만 꼬박꼬박 당비는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행동과 태도에 대한 진보 진영의 시선은 곱지 않다. 지식 권력으로 얻은 대중적 인지도에 상응할만한 ‘노력’과 '헌신'은 보이지 않고, 정파적인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에만 집착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비판과 그들의 상처에 대해 ‘피곤’ 할 뿐이라고 응수했다.

○ 조직과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진중권이 과연 누구와 연대할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 민주노동당이죠. 저는 지금도 제가 그때 그때 사안에 따라 여러 사람과 연대하고 있고 연대할 수 있다고 봐요.

○ 만약 빠른 시일 내에 양당 체제가 구축되고 민노당이 사회의 주류 정파로 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일까요?

● 그렇게 되면 아마 민노당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거세지겠지만 그럴 거라고 봐요.

○ 학교 다닐 때 어떤 학생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서울대를 나왔다면 공부는 잘 한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 좀 하면 모범생을 떠올리는데…

● '서울대의 나라' 그 책 정말 웃겨요. 그렇게 사는 서울대생 10%도 안되요. 어차피 상층부로 가면 고등학교 파벌이 있는 거지, 그 책은 강준만씨가 이회창 캠프를 공격하기 위해서 DJ의 학벌 콤플렉스를 무마시키기 위해 썼다는 목적이 있었죠.
고등학교 때는 까불까불한 개구장이였어요. 세상 물정 모르고 까불었죠. 정학 세번 맞고 고등학교 졸업했고요.

○ 파벌과 전체주의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네요. 국제 결혼을 하셨는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 집안 환경도 쓸데없는 아우라를 추구하는 게 없고 다들 '쿨'하죠. 특별히 반대는 없었는데, 누나도 국제 결혼을 했거든요. 독일 사람이랑 10년 살더니 갑자기 이혼하고 지금은 20세 연하의 핀란드 남자랑 살아요. 자식 둘이 국제 결혼을 한다니까 어머니가 조금 황당해 하셨죠.

○ 진중권 하면 전방위 투사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조선일보도 괜찮은 측면이 있다는 발언을 보고 놀랐습니다. 안티조선의 교주가 조선일보를 인정한다는 것은 대중들에게는 의외로 다가오는데요?

● 전 조선일보가 없어져야 할 신문이라고 보지 않아요. 그들의 순기능도 인정하고요. 다만, 그들이 가진 정치력과 영향력으로 여론을 선동하고 장난을 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일 뿐이에요. 조선일보는 없어질 수가 없어요. 없어져야 할 이유도 없고요. 처음부터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운동이 아니에요.

○ 그렇다면 건전한 비판에서 해석해야 합니까?

(‘건전한’이라는 단어가 영 어색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 건전한 게 아니고, 장난을 친거죠. 조롱하고, 비꼬고, 풍자하고, 한번 웃어보자는 거에요. 저들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면서.

○ 그렇다면 조선일보의 원고 청탁이나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안티 조선'이니까요. 저들이 변한다면 응하겠지만 변할 의사도 없으면서 쿨한 척 하는게 싫어요.

○ 원초적 불신이 심하네요.

● 그렇죠.

○ 앞으로의 언론 환경은 어떻게 보십니까?

● 조선일보를 구원하는 것은 상업주의라고 봐요. 조선일보의 이념성이나 실향민 정서, 언젠가 빼앗긴 내 땅을 되찾겠다는 원한 복수의 감정 이런것들이 시대에 안 맞죠. 대신에 시장 경제 이념들이 강해질 거에요. 중앙일보가 그런 식으로 잘 나가잖아요. 조선일보도 중앙일보처럼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살아 남기 힘드니까요.

○ 그게 긍정적이라고 보나요?

● 그나마 낫죠. 폭력성이 없으니까, 이념성을 무기로 정치적인 농간을 계속 해왔잖아요.

○ 조선일보의 이념성에 대항해서 독립 언론이 싸우고 있는데. 이념이 없어지면 상대의 실체가 없어지니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 어떤 면에서 그렇죠. 미국의 신문시장 보면 황당하잖아요. 말도 안되는 자발적인 애국주의. 이념은 정치적 타깃이 있고 싸울 수 있고 싸움의 목표도 분명한데 시장이 가진 악의 측면은 우리 모두가 공범자거든요. 사실 더 큰 문제는 경제 신문이거든요. 노동조합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든지 이런 식의 엉터리 이데올로기를 더 크게 퍼뜨리잖아요. 조선일보도 그렇고 삼성도 그렇고 사주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에요. 물질적인 풍요에 종속되는 삼성맨, 조선맨들이 문제지.

○ 그땐 시장과 싸우겠군요.

● 그렇겠죠. 그렇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 겁니다.

진중권의 꿈은 무엇일까? 추구하고자하는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도 없고, 존경하는 사람도 없고 정치적 야망도 없는 그에게 꿈은 그저 지금처럼 ‘자유’롭고 싶은 것일 뿐일까?

○ 유시민씨 같이 정치 일선에 뛰어든 사람도 있죠. 본인은 그런 생각이 없나요?

● 전 정치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에요. (웃음)

○ 어떤 점에서 그렇죠? 정치라는 것 자체가 이기적, 소모적이라는 얘기인가요?

● 다른 영역이라는 거죠. 나는 어떤 부분에 재능이 있는지 알고 있고, 이 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되는 거에요. 왜 모든 사람이 정치를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가요. 나는 내가 하는 것도 정치라고 생각해요.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이고, 당직자, 의원 이런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내가 미쳤다고 정치를 해요.

○ 그럼 왜 저 모양으로 정치를 할까 내가 하면 백배 천배 잘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은 안 드나요?

● 에이, 그런 확신은 없어요. 정치는 혼자하는 게 아니잖아요. 따라야 할 룰이 있고. 조직논리가 있겠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고, 내 성미에 안 맞죠. 그냥 안 맞을 뿐이에요. 정치인은 파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의미의 ‘권력’을 추구해요. 옳고 그름과 적합함과 비적합함이 더 중요한 기준이고, 새로운 문제를 보고 제기하는 것들이 더 중요해요.

사실 그의 본업은 ‘학자’이다. 그는 대중 논객 이전에 여러 권의 미학 저서를 낸 학자이고, 학교, 방송 등에서 강의하는 강사이기도 하다.

○ 강의도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일할 생각은 없습니까?

● 그 쪽이 워낙 그렇잖아요. 제가 또 말도 안되는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학교로 가는 것은 ‘포기’했어요. 아예 안 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학계에 대해 불만과 불평을 늘어 놓다가도 ‘포기’라는 지나치게 겸손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영 학계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음에도 진중권은 일인당 국민소득보다도, 근로자 평균임금보다도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스타급 학자이자 논객이다. 방송 토론 프로그램은 진보의 이름으로 ‘보수 우익’을 공격할 필요성이 있을 때 그에게 'SOS'를 치고, 인터넷을 통해 획득한 대중적 인지도는 심오한 미학 이론서들의 판매부수까지 늘려 주었다. 내년에는 저작들이 한꺼번에 출간돼서 따로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 할 정도가 된단다. 진중권은 이데올로기적 당파와 정파에서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가 획득한 지식권력은 그에게 자본으로부터의 해방까지 안겨준 듯 했다.

● 사실 대중적인 글보다는 이론서를 많이 쓰고 싶죠. 저의 대중적인 글쓰기는 이를테면 피아니스트가 학비 벌려고 밤무대에서 연주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모든 권력과 억압의 이데올로기, 조직과 정파에서 자유로운 그는 지상에서 한 뼘쯤 발을 뗀 듯 자신만의 로망을 추구한다. 다만 그 자신의 자유로움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세상의 모든 자유의지와 열정과 신념에 애써 귀를 닫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소통을 외면한다면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나쁜 놈’이 될 수 밖에 없거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아니 무시하려는 철부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열등감인지 자부심인지, 밑모를 뻔뻔함과 경쾌함, 자기 지식에 대한 현시욕, 비판을 책임으로 부르는 자기 합리화에 역겨움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우리 사회에서 간과할 수 없는 오피니언 리더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토론이 부재하던 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홀연히 나타나 게릴라식 글쓰기로 수많은 화두와 쟁점을 던진 그의 공덕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아직 우리 사회가 이데올로기의 망령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다고 본다면, 우리가 진중권에 주목 해야 할 이유는 아직 충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