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 낙랑예후설(樂浪濊侯說) 2
by Silla on 2021-01-21
삼국사기(1145)에는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고 군현으로 삼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은 군대가 동원된 중요한 사건인데도 중국의 사서에 대응하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후한서(445)에는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낙랑에 파견하여 왕조의 난을 진압하고 통치를 회복했다는, 삼국사기와 어울리지 않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37년에 고려가 낙랑국을 병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중국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44년 기록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관련 기록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후한서, 25년에 낙랑의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2) 후한서, 30년에 광무제가 태수 왕준을 낙랑에 파견하여 왕조의 난을 진압하고 낙랑에 대한 통치를 회복하였다.
(3) 삼국사기, 32년에 고려의 호동왕자가 옥저에서 낙랑국왕 최리를 만났는데 최리가 딸을 호동왕자에게 시집보냈다.
(4) 삼국사기, 37년에 고려가 낙랑을 병합하였다.
(5) 후한서, 44년에 한의 염사 사람이 낙랑에 복속해오자 염사를 낙랑에 소속시켰다.
(6) 삼국사기, 44년에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3)과 (4)는 고려의 기록일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기록에 나오는 이 낙랑국을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군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낙랑국과 낙랑군을 동일하게 놓고 보면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한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기록을 우위에 놓고 후한서의 기록은 거기에 맞춰 나갔다.
먼저, 왕조에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 뺏다. 25년에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가 된 왕조에서 32년에 고려에 공주를 시집보내는 낙랑왕 최리를 연결시키는 이야기는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무제가 낙랑에 대한 통치를 회복한 것도 고려가 낙랑국을 병합한 이후로 옮겼다. 훗날 중국이 낙랑을 통치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고려가 낙랑을 병합한 사건을 마지막에 둘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왕준은 이야기에서 뺏다.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사건의 시점을 옮기면 그 기록들과 어긋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 통치를 빼앗은 대상도 왕조에서 고려로 바꾸었다. (4)에 맞추기 위해서다.
왜 44년인가에 대해서는 (5)로 설명할 수 있다. 37년 이후로 시점을 옮겨야 하는데 다른 해보다는 한국인들이 귀순해 왔다는 44년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바다를 건넌다는 이야기는 삼국지의 237~239년 기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

0030 후한서(445)
建武六年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至遼東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0044 삼국사기(1145)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0237-0239 삼국지(289)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고려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이 모순되는 것은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낙랑국을 낙랑군 동부도위에서 독립된 예의 후국으로 설정하면 두 기록의 모순이 모두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