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황제 顓頊의 후손 祖明이 東海를 건너와 平壤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 受兢이 箕子로부터 王氏 성을 하사 받았다. ▐ 이 이야기는 樂浪(平壤)이라는 공간과 箕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낙랑 유민들의 묘지명에 나오는 樂浪王氏 이야기와 유사하다. 王建이 호족으로 있던 開城은 원래 樂浪郡에 속해 있던 곳이기 때문에, 開城王氏 이야기는 王建의 뿌리도 樂浪王氏처럼 樂浪의 귀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ᐥ
皇帝顓頊 顓頊孫夏禹 夏禹十三孫孔甲 孔甲弟祖明 祖明與劉累共 學擾龍 及孔甲復求龍醢 劉累懼與祖明共 避于東海中至 平壤日土山之原因居焉 受兢祖明之後 箕子東封之初 欲設八條之敎 風土有別 得國之尊者 然後可以行 國人擧受兢命爲士師 敎冑子 化民成俗 賜姓王氏 盖取其所居 日土之土 升其傍點 橫而長之也
황제의 손자 전욱이요 전욱의 손자 하우요 하우 13세손 공갑이요 공갑의 아우는 조명이니 조명이 유루와 함께 용길들이기를 배웠더니 공갑이 다시 용젓 담그기를 구하는데 이르러 유루가 두려워 여겨 조명과 함께 동해 중으로 피하여 평양 일토산 기슭에 와서 살고 있었다. 수긍은 조명의 후손이다. 기자가 동으로 임금을 봉해왔을 처음에 여덟가지 교를 베풀고저 하였으나 풍속과 지방이 다름으로 이 나라의 존대 받는 자를 얻은 후에 행할 수 있다 하니 나라사람이 수긍을 천거하였음으로 명령하여 사사를 삼으니 주자(맏아들의 뜻)를 가르쳐서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좋게 이루었음으로 성을 왕씨(王氏)로 주니 대개 그가 살고 있는 일토의 토자를 따서 그 곁에 있는 점을 위로 올려 가로 길게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