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에 관한 이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註 362
이 내용은 본문 외에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를 ≪고기(古記)≫에서 전하는 내용을 견훤의 탄생설화가 아닌 혼인설화라고 인식하여, 견훤의 처가를 광주 지역의 토착 호족 세력으로 바라본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하지만 이를 혼인설화가 아닌 탄생설화로 보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견훤의 출생지 및 아자개와의 관계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김상기, 「견훤의 가향에 관하여」, ≪가람이병기박사송수논문집≫, 1966). 한편 견훤이 광주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을 개연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견훤의 혼인설화로 이해한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지 않기도 한다(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註 363 북촌(北村)註 364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광주 북촌에 대해 ‘尙州 北村’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진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0).
경복(景福)註 365 원년(元年) 임자(壬子)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註 366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註 367 원년(元年) 갑오(934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여 견훤은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아들 금강이 즉위하여註 368 천복(天福)註 369 원년(元年) 병신(936년)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註 370에서 싸웠으나 후백제(後百濟)가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다.
註) 362
이 내용은 본문 외에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를 ≪고기(古記)≫에서 전하는 내용을 견훤의 탄생설화가 아닌 혼인설화라고 인식하여, 견훤의 처가를 광주 지역의 토착 호족 세력으로 바라본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하지만 이를 혼인설화가 아닌 탄생설화로 보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견훤의 출생지 및 아자개와의 관계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김상기, 「견훤의 가향에 관하여」, ≪가람이병기박사송수논문집≫, 1966). 한편 견훤이 광주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을 개연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견훤의 혼인설화로 이해한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지 않기도 한다(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註) 364
광주 북촌에 대해 ‘尙州 北村’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진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0).
註) 367
註) 368
주제분류
-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